2025/07 4

무제 (3)

최이제는 영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류재관은 확언하는 대로 최 요원을 흔들어 놓았다. 최 요원에게는 며칠이 지났어도, 해가 바뀌었어도 흐릿해지지 않는 반증이 있었기에 안심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돌리기 힘들었다. 류재관이 아무리 멀쩡하다 한들 당시에도 충분히 멀쩡했다. 자신이 소란스러운 바닷가에 놓였을 때도, 핸들을 손에 쥐고 있었을 때도, 선실에서 대화를 마쳤을 때도 그저 아무런 예고 없이. 징후는 있었으나 돌발적으로 다가왔던 그의 행동은, 이제 바다라는 징후 없이도 최 요원의 기억 속에서 충만했다.···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아까까지 뭐가 좋다고 떠들고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실내라 해도 여긴 외부다. 아무래도 이곳이 제 바다의 일부이고, 바다는 아직까지 자신의 미..

크리그어 2025.07.12

무제 (2)

류재관[ 이정 책방 ]딸랑. 맑은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청아하게 울려퍼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것을 확인한다면, 그건 종보다는 풍경에 가까운 생김새일 것이다. 고서들의 케케묵은 향기,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살, 아주 작은 소리로 흐르고 있는 지나간 시대의 음악. “안녕하십니까.” 류재관의 목소리에 손님을 맞으러 안쪽에서 나온 책방 주인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류재관 또한 마주하여 드물게 낯을 허물어 부드럽게 웃어 보였는데, 짧은 침묵 후, 주인은 찾으시는 책이 있다면 편히 말하라 얘기하고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다. 류재관은,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 다시 최 요원을 보았다. 아직 입가에 남아있는 미소가 그에게도 전해진다. “여기는, 그러니까··· 제가 AOC..

크리그어 2025.07.12

무제 (1)

류재관평화로운 세계는 여전히 어색하다. 물론, 평화의 기준을 크리쳐의 존재 유무로 결정지을 순 없다지만, 세계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된 세계 속에서 류재관은 더 이상 한 사람을 제외하면 청동 요원으로 불릴 일이 없을 터였다. 누군가 편의를 봐준 덕인지 몰라도 이미 두 사람 모두 복역을 마친 민간인이었으며, 나이 또한 원래 살던 세계와 동일했다. 놀라운 점은 통장에 찍힌 재산의 액수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찍혀있는 액수가 AOC에서 받던 생명수당금과 일치했다. 어떤 조물주 내지 상위 존재의 농간일까. 아마 그들과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였다. 아니, 만나고 싶지도 않다. “······후.” 짧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누워있던 이부자..

크리그어 2025.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