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이제는 영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류재관은 확언하는 대로 최 요원을 흔들어 놓았다. 최 요원에게는 며칠이 지났어도, 해가 바뀌었어도 흐릿해지지 않는 반증이 있었기에 안심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돌리기 힘들었다. 류재관이 아무리 멀쩡하다 한들 당시에도 충분히 멀쩡했다. 자신이 소란스러운 바닷가에 놓였을 때도, 핸들을 손에 쥐고 있었을 때도, 선실에서 대화를 마쳤을 때도 그저 아무런 예고 없이. 징후는 있었으나 돌발적으로 다가왔던 그의 행동은, 이제 바다라는 징후 없이도 최 요원의 기억 속에서 충만했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아까까지 뭐가 좋다고 떠들고 웃었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실내라 해도 여긴 외부다. 아무래도 이곳이 제 바다의 일부이고, 바다는 아직까지 자신의 미화된 기억 한 조각으로 남아있고, 그러니까···. 바다는 사람을 꼭 홀려서, 이끌리게 만들고, 그렇게 사람 하나를 먹어 치우고······. 아, 이곳의 바닷물은 너무 따스하다. 오래 머무르고 싶고, 긴장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녹아 풀린다. 최 요원은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얼어 죽어도 좋을 만큼 춥고 싶었다. 추위는 정신을 일깨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 외부가 원망스러워도 외부가 반드시 필요했다.
“······.”
돌아갈 테니 이제 다 괜찮다. 최 요원은 아무런 대답 없이 품에 맡겨진 종이봉투의 질감을 손끝에 남겼다. 돌아가려면 다시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타야겠지. 시간이 좀 지났으니 사람이 좀 빠졌을까. 그런 사소한 고민을 하면서. 하지만 언제나 사람이 마르지 않는 곳인데. 아직까지 많다면 거기서 놓칠 수도 있지 않을까. 문득 생긴 불안을 타고. 최 요원은 종이봉투를 한 팔로 고쳐 들며 잡아도 잡아도 계속 놓아져있는 류재관의 손목을 꽉 그러쥐었다. 갑자기 놓으라 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스미기도 전에 최 요원은 잡은 손을 이끌어 책방의 문밖으로 나섰다.
피부에 달라붙는 찬 공기에 당장, 어서 집으로 가고 싶은 감상만이 감돌았다. 가면 또 뭘 해야 할까. 우선 잠을 좀 자고 싶었다. 하지만 피로에 몸을 뉘었다가는 전처럼 텅 빈 시트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식사를 하기에는 간격이 너무 짧다. 배고프지도 않거니와 모래 같은 밥을 먹을 바에는 모래를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제 품에 있는 책을 같이 읽을까. 그렇지만 류재관보다 글자에 더 집중하기는 또 싫었다. 자신에게는 해답이 없었다.
“···생각해 둔 거 없어?”
류재관
“있었는데···.”
류재관이 말을 흐렸다. 역시 안 하는 편이 낫겠군. 밖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가까운 공원 산책을 해볼까 했다. 그런데 다시 나가려고 보니 이 사람 상태가 원복 된 듯하다.
먼저 잡힌 손목에, 눈이 커졌다. ···아까는 잡아도 본인이 싫다더니 언제 또 마음이 바뀐 건지. 이럴 거면 아예 손이라도 잡을까 싶다가도 남사스럽다는 말이 돌아올까 걱정이 되었다. 생사고락은 함께 넘어봤어도, 그리고 바다가 되어 그 속에 깊게 잠수해 보긴 했어도, 최 요원의 어떤 선까지 허용되는지는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으므로. ···그런데, 고민이 필요한가. 최 요원에게 위안을 줄 수만 있다면야 류재관은 못 할 것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류재관 본인도 최 요원의 온기가 절실했다. 잡힌 것부터 풀고 제대로 맞잡으려는 의도로 붙들린 손목을 뒤틀자마자, 갑자기 울 것 같은 표정이 돌아온다.
“아니 저 요원, ···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왜 자꾸 실수를 하지. 말로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이 기민한 사람이 그 짧은 찰나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 짐작이 가 류재관은 아주 급하게 최 요원의 손을 붙들었다.
“손이, ···당신 손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럼 놓지 않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제대로 뜻이 전달된 건지 알 수 없으나 류재관은 묘한 최 요원의 표정과 지겹게 머무는 어색함에 속으로 몸부림쳤다. 옅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돌아가는 길엔 택시를 탑시다. 그게 좋겠습니다.”
최 요원이야 거지니 가난하니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거야 최 요원이 자신의 통장을 보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물론 요원 시절 워낙 배 곪고 산 것도 한몫했을 테고. 그러나 둘의 재정 상태를 아는 류재관은 생각이 다르다. 원체 둘은 물욕이 없어 돈을 잘 쓰지 않는 편이었고, 이제는 값이 비싼 무기를 구매할 필요도 없으니 이 돈만 적절히 투자하며 굴려도 일하지 않고 평생 놀고먹으며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택시를 잡으려 큰 길가로 나왔다. 수많은 향이 코끝을 어지럽히고 커다란 음악 소리에 귀가 웅웅 울린다. 여긴··· 사람이 좀 많은 편이군.
“꽉 잡으십시오.”
최
“······!”
순간 종이봉투의 여백이 최 요원의 품속으로 우그러들었다.
놓으라고 하는 게 아니라 놓아버리는 것부터 걱정해야 했나. 불현듯 그런 생각에 손목을 잡았던 손에는 힘 하나 들어가지 않고 애꿎은 종이봉투를 안은 손에는 힘이 빠지지 않았다.
류재관이 일의 인과를 읊고 있는 것이 단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반사적으로 제 표정을 보고 급히 노선을 변경한 것인지, 원래 잡으려 했던 것인지 최 요원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류재관의 담담하지 못한 어조가 오히려 담담하지 못해서 신뢰와 불신을 오가게 만들었으나, 이어지는 옅은 한숨이 최 요원을 신뢰로부터 확연히 밀어냈다.
그렇다면 이 손을 놓아야 하는가. 주변이 너무 사나운 탓에 놓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단순 달래기 위함으로 덮어온 손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억지로 잡게 만든 것이라면 놓고 말리라. 분명 그렇게 다짐했건만, 손을 빼내려 당기는 참에 그날 놓으라 외치던 류재관이 스쳤다. 그것으로 시도가 좌절됐다. 축 늘어져 있던 손마디를 곱아 너른 손을 힘주어 감쌌다. 바스러지지는 않지만 동시에 놓치지 않게. 아주 단단히.
“재관아, 그냥 지하철로 가도···.”
역이나 길가나 사람 많은 건 다를 바 없어 보였는데, 여긴 어딘가 위험하기까지 했다. 맞잡은 손에 힘이 거둬질 틈이 없었다. 차라리 역은 사람들의 동선이 일정한 편이라 괜찮았는데. 도롯가로 나갈수록 계속 손을 뒤로 잡아끌게 된다. 위험하지 않은 게 없어 길거리에 오래 나와 있는 것이 불안했다.
류재관
“제가 안 놓칠 겁니다. 그리 불안하시면 봉투 이리 주시고 다른 손도 잡으셔도 됩니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안아 들고 건물 외벽을 타거나 옥상 위로 뛰어오르고 싶었다. 꺾인 적도 없는 날개건만, 중력이 이렇게나 원망스러운 건 드물다. 자꾸만 어깨를 스치는 불쾌한 접촉에 한숨을 삼키다, 겨우 도로변에 섰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인 만큼 손 몇 번 흔드니 택시가 다가와 그들 앞에 멈추었다. 뒷좌석의 문을 열고 최 요원의 어깨를 잡아 밀어 넣으며 자신도 겨우 몸을 숙여 구겨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와 함께 주소를 전달하자, 몇 번 내비게이션을 두드린 기사가 운전대를 잡으며 차를 출발시킨다. 차의 가죽 시트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는 게 연식이 오래된 차는 아닌 듯하다. 류재관은 자연스럽게 창문 바깥의 풍경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었다가, 최 요원을 돌아보았다. 또 무표정. 아니, 그저 생각이 많은 건가. 과잉된 감정이 도리어 표정을 지울 수도 있다는 걸, 류재관은 이 사람을 통해 깨달았다.
“···오늘 외출은, 어땠습니까.”
마냥 좋았다고는 말하지 않겠지. 지금도 쥔 손에서 땀이 배어나고 있는 걸 보면 그랬다.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하다 거뭇한 그의 눈 아래에 작게 한숨을 내쉰다. 닦일 리도 없지만 괜히 엄지로 문질러보곤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좀··· 도착할 때까지 눈이라도 붙이시지 그러십니까. 의자에 편하게 기대시든, 어깨나 다리가 필요하시면 빌려드릴 테니 가는 동안 만이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집에 가서는 지겹도록 바다 구경만 하시고요. 어떠십니까.”
최
당연하게도 차 안은 공기가 사뭇 달랐다. 공기가 달라짐에 따라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들은 달라졌다. 아무런 벽 없는 공간, 실외는 그런 공기들이 전부 뒤섞여있는 것도 모자라 언제든지 추가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차 안으로 넘어온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허나 택시조차도 익숙하지 않은 다른 공기였다. 밖에서 전조등을 보나 안에서 시트를 보나 별 차이 없다는 것이다.
“······괜찮았어.”
눈 밑의 은은한 압을 이유 삼아 피곤에 취한 눈을 살풋 감았다. 뭐가 싫었고 다시 나오기 싫다는 말은 부러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면목가증한 짓을 나와서까지 굳이 해야 하나 싶었다. 아마,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충분히 느꼈을 터다. 그렇게 넘겨짚었다.
좀처럼 둔하게 삼켜지는 법이 없는 류재관의 말은, 늘 들으면 퍼뜩 눈이 뜨였다. 아마 차 안이면 정말 자도 될 법했지만, 그렇게 안심했다가는 다시 그림자도 못 밟게 되는 거 아닐까. 전처럼 핸들을 꺾지는 못해도 자는 사이 목적지를 망망대해로 바꾼다거나, 안에서 난동을 부린다거나···. 류재관을 향한 최 요원의 시선이 차츰 맹렬해진다.
“아니야. 나중에 잘게.”
잠을 자는 법을 아는데도 잠을 잘 수 없다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차라리 잠을 자는 법이나 잠의 개념을 잊고 싶었다. 수면이 방해가 된 이 시점에서 이 피로의 해결법을 모르는 채로 지낸다면 더 편할 참이었다. 왜 인류는 이런 형태로 변화를 거듭하게 된 걸까. 잠을 자지 않으면 바다를 계속 볼 수 있었을 텐데. 날 때는 인간이었던 최 요원은 이제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단해진 낯으로 붙든 손을 매만지자 무언가의 해소가 미량 느껴졌다.
류재관
“······예, 당신 바라는 대로.”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목이라도 쳐서 강제로 기절을 시킬까, 혹은 수면제라도 타서 억지로 재울까 생각했던 순간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걱정된다는 명목하에 류재관이 제멋대로 군다면 둘 사이 신뢰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사람을 절벽에서 떠미는 꼴이다. 그가 깨어났을 때 류재관이 옆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아주 혹여라도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깨어났다가는··· 저 사람이 얼마나 부서질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꼭 유리라도··· 다루는 기분이군. 바다는 얼지 않는다 들었는데, 류재관의 바다는 어디 북극해쯤 되나 보다.
“제가··· 죄송합니다.”
해로운 후회가 류재관의 목에 돌처럼 걸려있었다. 몇 번이나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왜 하필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어야 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류재관은 언제나 ’하필‘에게 끌려다녔던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독일 때도 득일 때도 있었다. 하필 최 요원의 파트너인 덕에, 하필 우리가 A시 구출 임무를 맡아서, 하필 미고의 눈에 들어서··· 하필, 하필. 몰아치는 번뇌에 눈을 질끈 감은 류재관이 고개를 떨구고 최 요원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걱정 없이. 요원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제가 다 망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이대로 이 사람을 끌어안으면 그대로 부서질까 무서웠다. 물거품처럼 흩어져 버릴 것 같아서, 얼음처럼 깨져버릴 것 같아서, 불에 타고 남은 재처럼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류재관은 뜨거워진 눈시울에 힘을 주며 애꿎은 최 요원의 손만 꾹 쥐었다.
“내가 더러워지든 당신이 얼어버리든··· 그래도 바다니까. ···그러니까 버리지 말아 주세요.”
최
“······.”
이 생활을 거듭하면서 불안해지는 것은 최 요원뿐만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아무리 류재관만을 생각했어도 그런 생각은 범주 내가 아니었다. 불행하고 싶은 마음에 불행하게 사는 것도 아니지 않았는가.
류재관의 모든 말씨에 생각을 멎고 혼란스러워진 최 요원이 초점을 되찾았다. 정작 류재관은 기억도 드문드문한 일을 너무 꼬투리 잡았던 건 아닌지, 괜히 이렇게 된 게 전부 제 탓은 아닌지. 아니, 전부 내 탓이 맞다. 초점이 생기자 멎었던 생각이 기어코 다시 뻗어나갔다.
이 기억 저 기억을 들쑤시며 후회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지금 최 요원은 제 앞에 놓인 이가 그런 말을 뱉어내고 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영문 모를 다른 불안감이 최 요원을 덮쳤다. 류재관에게 불안정한 사람은 최 요원이겠지만, 최 요원에게 불안정한 사람은 류재관이었다. 최 요원은 류재관이 살아있는 한 죽을 수 없을 이유가 있지만, 류재관은 아니었다. 이변이더래도 그날부로 증명된 것이었다.
“추워······.”
최 요원은 한참의 간극 끝에 그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동시에 그의 말 어미가 흐려지기 전, 무섭게 몸을 돌려 류재관을 끌어안은 채로 몸을 푹 기대 눈을 감으면서. 류재관은 붙잡거나 끌어안아서 놓치지 않아야만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아서, 당장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무작정 끌어안았건만 고개가 들렸을 때 눈을 마주치기가 무서웠다.
연약한 불씨 같은 체온이 그 순간 녹아내릴 듯 뜨거운 불덩이처럼 다가왔다. 최 요원은 피와 살을 탐했던 것처럼 그 체온을 갈구했다. 아마 이 체온이 영원하다면 얼어붙은 바다야 충분히 녹이고도 남을 터였다.
류재관
“······!”
파도가 쳤다. 그것이 류재관을 덮었고, 그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차갑게 얼어붙었다. 예상하지 못했기에 숨이 멎었고, 그렇게 몇 초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듯 사고가 정지했다.
최 요원이라는 바다는 분명 뼈가 시리고 손끝이 다 곱을만큼 차가워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함부로 그 속에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바다는 바다인지라, 그리고 으레 바다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인력이 있는 터라, 분명 넓은 포용력을 기대하며 다가가는 이들이 많았을 거라 짐작한다. 다만, 류재관이 옆에서 지켜보고 직접 부딪혀보며 종내엔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한 이 바다는, 생명 하나 품기에도 벅차 보이는 마른 바다였다. 모든 걸 다 내어주니··· 이리 된 걸까.
류재관은 그래서 종종 제 바다가 텅 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데. 동이 틀 때 생기는 옅은 주홍빛에 물든 낯도, 엉뚱한 것에 꽂혀 윤슬보다 반짝이고 있을 때도, 가끔 모든 걸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강하고 깊어 보이던 순간도. 그건 다 제 바다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여전히 너울지고 파도치며 제가 바다라 주장하는 명징한 증거.
류재관이 하나 고려하지 않은 게 있다면, 결국 온도와 온도가 맞닿으면 따뜻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최 요원이 제아무리 차갑다 한들, 또 류재관이 얼마나 뜨겁다 한들 그게 그리 중요할까. 바다의 품은 류재관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넓고 따스했다. 멍청하게 굳어있던 그가 결국 최 요원의 어깨가 다 젖을 만큼 울게 된 이유였다. 부서지고 흩어질 거라 생각했던 최 요원은 그저 단단한 몸에 살짝 낮은 체온을 가진 이었을 뿐이고, 류재관은 이제서야 자신들이 평범해졌다는 걸 진실로 실감할 수 있었다. 라디오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기사의 배려라는 걸 알아챘으나 히끅거림이 멈추질 않아 그저 팔을 벌려 최 요원을 마주 안은 채 어린애처럼 매달렸다. 이런 추레한 꼴을 가급적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동시에 당신 앞에서는 추태를 부려도 괜찮을 거란 묘한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우, 우는··· 거 별로, 입니, ···까.”
그럼에도 묻는 건 잊지 않았다.
최
최 요원은 제 어깨에 느껴지는 가냘픈 떨림에 미묘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절로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울고 있는 그 모습이 반면 최 요원의 어색한 미소를 자아냈으나, 웃어도 되긴 하는 건지 내심 갈피가 잡히지 않아 또 생각에 감정이 묻혀버렸다.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는데 류재관의 체온에 녹아 눌어붙은 듯 팔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뜨거운 열에 기화되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최 요원은 죽어라고 팔을 올려 눈물을 닦아주는 것 대신에 류재관의 뒷머리를 쓰다듬어 헤집었다.
“미안······.”
동시에 쥐어짜 낸 목소리가 전혀 맞지 않은 대답을 내놓았다. 제 탓일 테니 뭐든 괜찮다는 걸 조금 우회했을 뿐인데 생각이 복잡해져 대단히 어긋났다. 왜 우는 걸까. 아무리 제 탓이래도 이유 하나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최 요원은 무릇 반성하는 시간만 늘어갔다. 아마 모든 이유에 자신이 있으리라.
아무리 울어도 가시지 않는 열감에 그간 자지 않았던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최 요원은 아직 눌어붙어 있는 남은 손으로 류재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다시금 눈을 감았다. 눈을 붙이고 있는데 이렇게 편안한 게 얼마 만인지. 류재관이 울음을 그치게 되면 떨어질 성싶다가도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그 열기가 탐나지 않는 법이 없었다.
류재관
대체, 당신은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힘겹게 돌아오는 답에 곧장 의문이 들다가도, 또 되묻기엔 목이 막혔다. 뒷머리에 얹어지는 다정한 손길에 또 한 번 울컥,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으나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는 것으로 어떻게든 울음기를 떨쳐내려 부단히도 애썼다. 목적지 근처라는 내비게이션 소리가 어렴풋이 들릴 때쯤에야 간신히 이성이 돌아왔다. 얼마나 울었던 건지 시야가 물기에 젖어 아주 흐리멍텅했다. 최 요원의 어깨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류재관은 고개를 겨우 들며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비다가, 그의 어깨너머 창문으로 보이는 집 근처 풍경에 망연한 얼굴로 그곳을 응시했다. 억눌린 목소리가 겨우 새어나온다.
“······요원님. 집, 다 왔습니다.”
그렇게 입을 떼며, 그의 팔을 감싸 쥐고 서서히 몸을 떨어뜨렸다. 집이 조금 더 멀었으면 좋았을까. 퍽 아쉬운 기분에 한숨을 삼키고 있으면, 닿았던 체온이 멀어지기 무섭게 시린 기운이 둘 사이를 빠르게 맴돌았다. 류재관마저도 잠시 멍해질 정도의 엄청난 한기였다. ···뭐지? 눈살을 찌푸리며 최 요원을 돌아본 그가 자신과 비슷해 보이는 표정을 마주하곤 더욱이 의문스러워졌다.
“저기 기사님, ···계산.”
기사에게 카드를 건네고 계산을 기다리는 와중에도 초조한 기분에 다리라도 떨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위에 머무르는 한기는 아주 가실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그나마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라곤 아직 이어져있는 손이 다였다. 오직 그곳만이 맥박이 뛰고 피가 돌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에 눈을 꾹 감았다 뜨곤 겨우 카드를 받았다.
최
분명 밖인데도 잠에 빠지려 했던 것 같은데, 곧 죽어도 열기가 줄어들면 잠을 놓고 번뜩 눈을 뜨게 됐다. 아니, 오히려 사라지는 것에 더 과민해졌다. 이래서야 원래 있던 것이 사라지는 것보다, 아예 없게 두는 것이 더 편할 테니 멀리 있는 것이 낫지 않은가. 오히려 과민해지는 것이 더 안전한 건 아닌지···. 과대한 사색 사이로 급격하게 들어찬 냉기에 표정이 멀뚱해졌다. 마주친 시선도 여간 다를 것이 없는 게 방금까지 침수된 눈이 확연해진 건 묘한 물증이었다.
여적지 얼어붙은 머리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 것을 다시 한번 냉기가 할퀴고 지나갔을 때는 벌써 다 끝난 모양이었다. 최 요원은 영 불안한 표가 묻어나는 류재관이 못마땅해 우선적으로 차 문을 열었다. 서로 반대편 문으로 헤어질 틈 없이 그의 팔을 이끌어 나온 최 요원은 곧장 집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튼 것과 다르게, 차 문을 닫고도 아주 천천히 걸었다. 시린 추위보다 뜨거운 손은 밖이 아니면 닿을 일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조금만 천천히 가자.”
류재관이 초조한 것과는 별개였다. 최 요원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당장 손 안에 있는 상황이었다. 위태로운 겨울 바다 위에서 느낀 것과는 다른 구석이 있는, 그런 뜨거움을 조금 더 오래 느끼고 싶었다. 며칠간 집에서 나오지 않은 탓에 이 체온에 닿을 수 없던 것일까. 집은 붙잡을 일이나, 외부인이나, 찬 공기가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별일 아닌 것처럼 굴었을 때는 체온을 영영 느낄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체온의 덕을 봐서 매일 같이 외출을 나오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갈 이유가 생겼다고 해서 나가지 않을 이유가 사라지는 것은 또 아니었다. 잡을 일이 없는 건 아쉽지만 잡을 일이 생긴다는 것부터 부정적인 징조였다. 참 아이러니한 딜레마에 갇힌 기분은 이런 걸까. 맥없는 생각에 집중할수록 맞잡은 손에 힘이 쏠렸다.
류재관
“······예.”
뛰어서라도 집으로 향할 줄 알았던 이가 뜻밖에 뱉은 말에 류재관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막상 들어갈 때가 되니 아쉬워졌나. 그렇다면 외출의 성과가 조금은 있었단 뜻이다. 최 요원의 속내를 읽을 순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여전히 속을 태우는 불안함과는 별개로 내심 기분이 좋은 듯 내려가 있던 입꼬리가 미약하게나마 호선을 그렸다.
맞잡은 손의 맥동은 여전했다. 단순히 피가 통하지 않아서, 혹은 과하게 몰려서라고 치부하기에는 육안으로 봤을 때 전혀 문제가 없었다. 류재관은 맞잡은 부분의 특이성에 대해 곱씹으며 보폭과 발걸음을 맞추기 위해 애썼다. 세차게 부는 겨울바람 따위에 귀와 뺨이 얼어붙고 있어도 그건 지금 스스로가 느끼고 있는 이상한 한기에 비하면 온풍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이 순간 제 바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해 보려 해도 한번 얼어붙은 바다의 표면을 꿰뚫어 그 아래를 쳐다보기란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간 녹을 수 있겠지. 희와 비는 친우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잡은 손을 느릿하게 앞뒤로 흔들어보았다. 곧장 불안한 눈초리가 붙었다. 류재관은 일부러 손에 힘을 꽉 쥐었다 풀며 그가 보란 듯 옅게 웃어 보였다.
“···제대로 손을 잡는 건 처음인데 좋아서 그랬습니다.”
더 닿을 수 있다면 이 불안함이 가시는 건지, 그게 궁금했다. 남들 시선이야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불쑥 고개를 내민 감정을 정의해 본다면 그건 독점욕이었다. 나만 거닐 수 있던 짙푸른 바다를 또 다른 누군가가 탐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제 속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아까의 초조함은 이것 때문이었나. 제 감정 하나 이렇게 뒤늦게 공부해야 한다는 게 새삼 류재관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바다가 된다는 건 스스로의 심연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인 줄 몰랐다. 착잡한 심정에 입술을 한 일자로 만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겸연쩍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물었다.
“제가··· 저도, 춥다고 느껴지면 아까처럼 해주실 겁니까?”
최
느리던 걸음마저 멈췄다.
지금? 분명 당혹감에 멍청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제 목이 울리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 없이 그저 놀란 것 같은 시선만이 류재관에게로 전해졌다. 계속 추울 거라면 지금도 하고 나중에도 하면 될 텐데. 금세 좋을 대로 굴러간 머리가 한결 간결하게 답을 낸다. 많던 생각들이 가시자, 최 요원은 주저 없이 류재관의 몸체에 팔을 감아 거리를 좁혔다. 열감이 다시금 번져왔다.
“···추우면 계속해도 되는 거야?”
그렇다면 평생 이 열기를 끌어안고 살아도 될 것이었다. 온몸이 전부 기화될 때까지는 얼마든. 그야 최 요원은 영원일지도 모를 남은 생 아주 시리게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또 다른 이유도 최 요원의 목에 자랑스럽게 매달려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손을 잡는 것뿐만 아니라 두 팔로 양껏 끌어안는 게 이렇게 안정감이 들 일인지. 류재관은 어느 순간부터 따뜻한 바다라고 생각했는데, 가까워졌을 때 이렇게 뜨거운 것을 보면 어디 영원히 식지 않을 불덩이라도 삼켰나 보다. 이제야 그 열기를 깨달은 것이 원통스러울 지경으로, 최 요원을 점차 녹여서 바닷물 일부로 만들었다. 이렇게나 뜨거운 걸 그저 따뜻함으로 덮고 지냈다니, 그만치 어지간히도 멀리 있었던 걸까. 갑작스럽게 생각대로 멀게 느껴지는 체온에 류재관의 옷자락을 구길 듯 쥐었다.
“이렇게 있어도 추우면?”
류재관
“······그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류재관은 순간 고민에 빠졌다. 부둥켜안고 있어도 춥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삶 자체는 굴곡진 선으로 점칠 되었으나 참 보통 성인 남성의 사고 회로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면 연인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제아무리 바다에게 헌신적이어도 그렇지, 감히 그런 식으로 당신을 넘보는 건···,
“그러니까···.”
묵직한 바다의 시선에 류재광은 한없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최 요원의 눈동자 속 깊고 고요한, 그러나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은 푸른빛으로 형형했다. 꼭 도깨비불 같기도 하여,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실례를 범해도 그저 또 홀렸다고 변명하고 싶어질 정도로.
아,
이래서야 불가항력이 아닌가.
제 옷자락을 쥔, 차고 까슬하게 건조한 손등 위를 가볍게 쓸었다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감싼 류재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진다. 하얀 얼굴 위 가장 붉고 따뜻한 곳 위로 또 다른 미약한 온기가 조심스럽게 겹쳐졌다. 최 요원이 니가 정말 미쳤냐고 갑자기 손을 들어도 당연히 맞아줄 생각이지만, 동시에 이 생경한 감각이 제 몸에 뿌리를 내리고 온몸으로 뻗쳐나가 생각을 제대로 이어나가기가 무척 버거웠다.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인다고 했지. 그렇다면 내가 지금 바다에 빠져, 바닷물을 마시고 있는 게 틀림없다. 한기는 해결됐을지 몰라도 지금부터 시작되는 건 또 다른 갈구였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니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져 더 깊이 상대를 침범한다. 초점이 죄 풀린 눈동자가 최 요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
최
사람이 물에 빠지기 직전에 뭐라도 잡으려 하는 것처럼, 갑자기 들어차는 바닷물에 옷자락을 쥔 아귀힘이 부쩍 강렬해지다 못해 손이 떨렸다. 분명 숨을 맞붙였는데 숨이 막히는 걸 보니 그도 분명하면서도 한결같이 바다였다. 최 요원은 미쳤냐고 손을 드는 대신 경련하던 손에 힘을 느슨히 풀어냈다.
둘의 시선이 엉겨붙자 그제서야 최 요원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자각했다. 바다가 직접 불어넣는 숨은 온몸을 녹일 듯이 뜨거웠다. 열에 굶주린 자가 달치는 화기를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동안 최 요원은 류재관의 몸을 걷어안고 닿을 수 있는 모든 열기에 닿고 삼키려 애를 썼다.
“······.”
분명 겨울 찬 공기의 한복판 속이었으나 냉기 하나 느껴지지 않을 즈음에서야 숨이 떨어졌다. 뜨거운 열에 머리가 핑 돌면서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아 몇 번이나 입술을 겹친 뒤에야 최 요원은 둘 사이에 얇은 거리를 만들었다.
“···재관아, 들어가자.”
'크리그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제 (2) (5) | 2025.07.12 |
|---|---|
| 무제 (1) (1) | 2025.07.12 |
| [부록] 클리셰 SF 세계관의 크리쳐는 그어그어하고 울지 않는다 (0) | 2025.05.10 |
| (25. 05. 07) 클리셰 SF 세계관의 최강자들도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고 싶어! [외전] (0) | 2025.05.08 |
| (25. 04. 17) 바다의 혀 (0) | 2025.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