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그어

무제 (2)

RJG 2025. 7. 12. 17:24
류재관

[ 이정 책방 ]

딸랑. 맑은 종소리가 머리 위에서 청아하게 울려퍼졌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것을 확인한다면, 그건 종보다는 풍경에 가까운 생김새일 것이다. 고서들의 케케묵은 향기,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살, 아주 작은 소리로 흐르고 있는 지나간 시대의 음악.

안녕하십니까.

류재관의 목소리에 손님을 맞으러 안쪽에서 나온 책방 주인이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류재관 또한 마주하여 드물게 낯을 허물어 부드럽게 웃어 보였는데, 짧은 침묵 후, 주인은 찾으시는 책이 있다면 편히 말하라 얘기하고는 목덜미를 문지르며 다시 안쪽으로 사라졌다. 류재관은,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 다시 최 요원을 보았다. 아직 입가에 남아있는 미소가 그에게도 전해진다.

여기는, 그러니까··· 제가 AOC 입대 전까지 신세 지던 곳입니다. 언젠가 당신을 데리고 와 보고 싶었는데, 그 세계에서는 크리쳐 사태가 발발하자마자 폐업해서··· 그렇게 영영 사라질 줄 알았지요.

하지만 이곳에 있었다. 류재관에게도 최 요원에게 내보일 과거 한 조각이. 다 지워져 잃어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러니 당신이 복원한 바다의 일부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반드시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최 요원은 번잡한 기억에 휘둘려 혼미해진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이끌려졌다. 어쩌면 그 수가  천문학적이었을 그의 전생 중 하나에서 말했듯, 바다는 본래 가장 두려운 것이지만 사람을 홀리는 힘 또한 막강하기에 사람이 저어되기 이보다 충분한 명분이 또 없다. 당장 최 요원과 류재관이 떠난 바다를 회상해도, 당장 옆에 놓인 서로만을 취급해도 결딴날 일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먼저 잡고 싶었는데···. 다시 류재관의 손에 붙들려 있는 손목을 보면 최 요원의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다만 그가 먼저 류재관의 손목을 그러쥐지 못하는 몇 가지의 이유를 홀로 흘려보내고 있자니 상념을 깨는 예리한 소리가 강호의 지탄처럼 귀에 처박힌다.

이어지는 겨울답지 않게 훅 끼친 따스한 바람이 무거운 공기로 닿아 최 요원의 어깨를 짓눌렀다. 뱉는 숨에 따라 축 처지는 어깨가 전과 같이 마냥 피로한 기색만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았다. 기묘하게도 편안한 느낌에 몸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현재의 최 요원에게 개괄적으로 가장 환영 못할 감정이었으나, 필요성이야 아주 절실했다. 잡힌 팔에 무심코 들어갔던 힘은 저도 모르는 사이 탁 풀려 늘어진 지 오래였다.

반복된 운명을 갈무리한 것은 몇 번이고 생각해도 후회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 후회스럽다면 필히 신토불이 어긋나 땅 잘못 밟은 운명 속 최 요원이었으리라. 크리쳐 사태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대가로 탄생했다는 걸 잊은 적도 없건만 새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을 처음 마주하는 기분은 어느 한 구석 기이한 느낌이 있었다. 류재관의 미소조차도···.

“여기서 뭘 했었는데?”

이곳도 바다의 일부라더니 이것도 역사 바다라고 사람 홀리는 힘이 있었다. 최 요원은 류재관에게서 시선을 떼내어 이 정감 가는 장소를 이루는 요소들을 훑었다. 아마도 그날 이후 그가 처음으로 밖에 가져본 관심일 것이다. 물론 이유 없는 장소도 아니고 제 바다의 일부이니 관심 가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최 요원이 아무리 밖을 두려워해도 제 바다를 외면한 적은 없지 않은가. 되려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다 못해 극단적으로 관심을 뒀을 뿐이다.

그러니, 이것은 지극히 필연적인 물음이다.

 

류재관

“직원으로 근무했었습니다. 학생일 때,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어서 돈이 필요했거든요.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저의 공부방이기도 했습니다.”

저 안쪽의 작은 문 보이십니까? 저기를 열면 계단이 나오는데···. 쉼도 없이 이어지는 말들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들의 신발을, 양말을, 맨발을 시원스레 적셔놓는다. 찝찝하고 축축한 감각이 아니라, 꽉꽉 눌러 담은 새벽 공기가 액체가 되어 발을 간지럽히고 흩어지는 듯한 유쾌한 감각.

류재관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문제집과 참고서들 속 남겨진 메모들이 자신의 과외 스승이었다 말했고, 시집 맨 앞장에 쓰인 누군가의 짧은 고백을 더듬어 보며 사랑과 그리움의 정의에 대해 고찰해보았으며, 누군가 절반쯤 읽다가 집어던진 흔적이 역력한 어느 철학서들로부터 세상을 냉철하게, 혹은 관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얻었다 이야기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문장이 되었건 그것은 류재관이라는 바다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스스로는 여전히 모자라고 빈곤한 사람일지언정, 메말랐던 바다를 ‘푸르다‘ 고 말할 수 있게 도와준 건 이들이었다고.

“그리고··· 제 앞에 요원님이 나타났습니다.”

백지나 다름없던 크리쳐 최 요원을 만나서 도리어 잠시 갈피를 잃었던 건 류재관이었다. 갓난아기를 안게 되면 이런 기분일까. 그는 크리쳐였다. 인두겁을 뒤집어썼을 뿐 이따금 이성을 잃고 피와 살을 탐하고, 눈만 돌리면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 일쑤인 골칫덩어리였다. 왜 본부가 제게 감시역을 맡겼는지 이해가 가면서도, 왜 하필 나였어야 했나 골머리를 앓았다. 정이 붙을수록 당신을 죽이는 일은 괴로웠고 언젠가,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봐 최 요원의 시체 옆에서 이름도 모를 신에게 빌었던 때도 있더랬다. 이 ‘사람’은 제 동료라고, 그리고 나의 가족이라고.

“물론, 당신이 나보다 더 손윗 기수 대원인데다 한참 형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머리가 어지럽긴 했습니다만.

중앙관리체제를 얻자마자 조회해본 건 최 요원의 과거 기록이었다. 다만, 크리쳐 실험을 위해 대부분 데이터가 말소된 상태였으므로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뭐, 그건 이제 중요치 않겠지요.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들려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요원님에 대해서요.

바다가 당신을 응시했다.

 



바다가 훅 밀려온다.

바다에 대해 깊게 알게 되는 것은 온당할 수는 있으나 기쁜 일만은 아니다. 바다는 오래토록 불가침 영역이었으며, 그로 인해 인간이 바다에 대해 파고드는 것은 방자한 일이었다. 살아온 몇 백 년간 바다나 심해의 진실에 아주 밀접한 이야기를 다룬 서적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지 않은가. 물론 이번생을 제외한 최 요원의 삶에서 그런 도서나 논문을 찾아 읽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2년은 바다조차 모른 채 또 다른 바다를 만났고, 거진 100년은 죽어 있었고, 또 몇십 년은 죽어라 싸웠으며···. 그러한 이유로 최 요원은 바다에 대한 막막함을 떨칠 수 없었다.

류재관은 그런 바다보다 더한 바다였다. 수 세계를 걸친 그는, 그럼에도 지금 곁에 있는 그는 저 드넓은 바다를 넘어 우주보다도 더 넓은 심해를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형체가 바다의 티끌만 못해도 각자 바다를 훌쩍 뛰어넘는 심해를 품고 있는 존재이기에. 끽해야 백 년 사는 존재가 몇 백 년 더 살았으면 그 범위는 얼마나 방대하겠는가. 그러한 이유로 최 요원은 류재관에 대한 막막함도 떨칠 수 없었다.

얘기하다 보면, 어슴푸레 땅거미처럼 올라온 시원한 냉기는 발치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오금까지는 온 것 같은 착각을 이게 한다. 안 힘들게는 못 살았네. 최 요원은 바다를 한참 마주 보고서야 간신히 바다에게서 눈을 떼내었다.

“······.”

최 요원은 새삼 가끔씩 제 심해를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에는 경황이 없었다. 류재관이 이따금씩 최 요원의 과거를 묻는 것과 비슷하게, 자신보다는 남의 심해가 궁금한 것은 당연지사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최 요원은 눈을 돌린 곳에 놓인 아무 책이나 꺼내어 펼쳤다.

“···나 이제 요원님도 아닌데.”

언제까지 그렇게 부르려고. 류재관이 최 요원의 심해를 묻는 날에는 노회한 발상으로 늘 바다의 물음을 외면했다. 이번에도 이변은 생기지 않았다.

 

류재관

“아.

···저 사람이 이번에도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말에 무릇 반박하기도 어려웠다. 틀린 말이 아니니. 그러고 보면, 이제 최 요원은 자신을 더 이상 요원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오직 이름만으로 류재관을 호명했는데, 이따금 알 수 없이 마음 한 구석이 뻐근할 정도로 저렸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에는 영혼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저승의 차사들이 생자를 세 번 호명하여 망자로서 인도하는 건 아닐까. 최 요원이 자신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고 한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니, 아니다. 어쩌면 영혼 따위가 귀속되는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날 수도. ···아무렴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제 혼이 잠길 곳은 새카만 심해의 바닥이리라. 이 사람의 눈동자만큼 푸르른 바다의··· 그래, 이 사람. 나의 바다.

그럼, 뭐라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피식, 낮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내리깐 최 요원을 지나쳐 안쪽 서가로 훌쩍 향한다. 그거 아는가? 어떤 서가는 다른 내음이 난다.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시간은 역행한다. 이쯤이··· 아 그래, 이쯤이다. 발걸음이 멈추고 고개를 들어 가장 위쪽 책장을 응시했다. 손을 뻗어 손끝에 걸린 책을 잡아당기자 먼지가 공중을 가볍게 흩날린다. 음, 짧게 침음한 류재관의 손가락이 펼친 책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다시금 유령처럼 옆에 서있는 그의 존재를 느끼자마자 고개를 돌리고는, 옅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최 형?

 



수 백 년을 거듭하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을 들었을 때 무슨 기분이 드는지 아는가? 이에 묘사할 겨를조차 없이 된통 후려 맞은 것처럼 욱씬거린다. 목이 아닌 가슴이. 당혹감에 동그랗게 뜨여진 눈이 류재관의 푸르른 눈으로 고정된다. 습관적으로 비죽 올리던 입꼬리가 그만 작동을 멈춰 이도저도 아닌 표정이 된다.

최 요원과 류재관이 함께한 순간부터 그 어느 하나 예상할 수 있었던 순간이 없었다. 몸소 적응했을 뿐이지 언제나 경우 없는 수는 최 요원의 가장 큰 적수였으며, 그 덕을 제대로 보아 전생과 전 세계라는 요망한 너울을 헤쳐나가기 힘들어하기도 했다. 아직까지 최 요원을 뒤따라 오는 적수가 최근 그를 무정한 냉혈한의 탈을 쓰게 만들기도 하지 않았는가.

그 속에서 어느 세계에서나 가장 단순한 것은 자신의 파트너였다. 어느 때에는 서로가 서로의 최대 적수였으나, 간혹 바다에 해미가 끼어 가늠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남은 최 요원의 유일한 적수.

“너무 훌쩍 넘어간 건 그렇다 치고···.”

···진짜 안 어울린다. 아냐는 듯이 장난 어린 말을 맺은 최 요원의 입가에 청승맞은 미소가 번진다. 예상에서는 벗어나지만 범주를 이탈하지 않는 류재관은 그야말로 최고의 적수일 것이다. 이 세상 제일가는 적수에게 기어코 올라간 입꼬리에는 미련이 없었다.

 

류재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곧장 정색하며 쌀쌀맞게 대꾸했지만, 그마저도 류재관 나름의 농이었다. 제게 가장 익숙한 모습의 최 요원을 마주하자, 류재관은 그제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이제 좀 낫군. 안도의 한숨을 꾹 참으며, 대신 시선을 멀리하여 시야를 확장시킨다.

최 요원의 뒤로 보이는 서점의 풍경. 그 속의 최 요원님이라니.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사람과 여길 드나들었던 것처럼, 퍽 잘 어울리지 아니한가. 또 한 번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 사람과 공간의 조화에 속으로만 감탄하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마저 책을 뒤적였다. 아마도 뭐 하냐고 물음이 따라붙을 게 뻔해, 류재관이 먼저 말을 꺼낸다.

“바다의 어원이 궁금했습니다. 이 책의 필자도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답을 찾고 있더군요.

그리고선 최 요원의 방향으로 페이지를 펼쳐 내밀며, 손으로 두 문장을 가리켰다.

「바다가 왜 바다라고 불릴까. 그 어원이 궁금해 포털 사이트를 열심히 뒤적이면, ‘받아들이다.’ 로부터 유래되었단 가설을 찾을 수 있었다.」


「옳다구나!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포용하는 -좋은 의미로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바다야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

최 요원의 눈이 문장의 온점에 닿을 때쯤, 류재관이 물었다.

“이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까?”

 



최 요원은 잠시 함구한 채 온점에 닿은 시선을 줄표로 되돌렸다.

「-좋은 의미로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두 사람의 꽤 오랜 세월을 관통하다 못해 추월하는 문장이었다. 제 바다는 감내하고 포기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함께했을 때 함께 포기한 것들도 과연 적지 않았다. 최강의 인류가 됐을 적부터 개인의 일상과 평안에 손을 놓은 격이나 마찬가지인 것은 물론, 자유 또한 모순적이게도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삶의 복락이야 한참 저버리고도 그 운명을 받아들였다.

류재관은 그런 억압도, 고통도, 이변도, 괴물도, 외면도, 이별도, 가짜도, 가령 서로도 전부 포용할 수 있는 존재였다. 넉살 좋은 파도로 뭐든 덮고 뭐든 집어삼킬 수 있는 바다. 가끔은 신념에 무언가 휘어잡아도 결국 까치놀 받쳐주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최 요원은 줄표 속 문장처럼 반복적인 굴레에 갇힌 듯한 시선을 류재관에게 돌리고, 다시 줄표 안에 가두고, 제 턱이나 허리를 짚고 고민하는 것을 몇 번 반복했다.

“아닐 건 뭐야?”

차가울수록 빠져들고 싶은 바다는 추위를 두려워하는 이도 받아들였는데. 최 요원의 입에서 바다가 발음되기 이전에도 류재관은 줄곧 바다였는데. 깨달았기에 이제야 서로의 바다가 되었을 뿐인데. 그 유래야 어떻든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바다가 바다라 불리우지 않는 세계에서도 기어코 서로의 언어로 바다였으리라.

 

류재관

“······삼켜지고 싶을 때도 있었고, 삼키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도 못하게, 그리고 함부로 죽을 수도 없게, 단지 제 눈앞에만 두고 싶었기에 미쳐있던 과거 어느 시점에는 방 안에 묶어두고 내보내지 않았던 것도 같다.

요원님은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젠 고생 끝이라며 후련하게 웃으시더군요.

그래서 분명 당신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인터폰으로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청동 요원님, 최 요원이라는 자가 청동 요원님을 만나겠다고 합니다.’
‘······뭐?’

아, 당신이 자결했구나. 그리고 다시 마주한 최 요원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를 낯설어 하면서도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걱정하다, 뜻 모를 격려까지 건넸다. 내가 직전의 당신의 사지에 족쇄를 걸고 있었다는 건 전혀 모른 채.

청동 요원은 하나 남은 눈으로 그를 허망히 응시하다, 아주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서 최 요원의 머리를 총으로 쏘았다. 이제는 바다라고 부를 수도 없던 아주 얕게 남아있던 류재관의 자아는, 당시를 끝으로 완전히 메말라버린다. 류재관의 인간성을 이루고 있던 최후의 세포가 곧 최 요원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꼴이었다. 그 뒤로는 정말로 기억이 없다. 껍데기만 남은 청동 요원은 그 후 삼십 년 가까이 움직이다, 꼭 100년을 채웠을 때 만난 최 요원의 손에 가루가 되어 흩어졌었다. 아주 마지막의 마지막 즈음··· 그 몸이 바스러질 때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까마득한 옛날엔 바다를 삼키겠다고 그렇게나 애썼는데,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죠. 누가 누굴 삼키고가 아니라··· 그저 바다는 바다로 남겨두고··· 바다와, 그 망망대해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정을 품으면 됩니다.

둥근 해를 삼키고 뱉어내는 일자의 수면과, 볕 좋은 날에 그 위로 생기는 윤슬과, 커졌다가 작아지는 파도와, 발이 시리도록 차갑다가도 막상 들어가 앉아있으면 나가기 싫어질 만큼 푸근한 온도와, 발가락 사이를 스치는 간질거림과, 물결 위를 스치는 잔바람까지 모두.

“솔직히 말해볼까요. 제가 또다시 그런 불미스러운 일로 당신에게서 도망치거나 사라진다고 한들, 당신은 끝까지 저를 따라오실 겁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겠지요.”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 류재관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피식 웃었다.

세계를 구한 당신께 죄송한 말이지만, 만에 하나 당신이 죽는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이 세계를 버릴 겁니다. ···바다가 마른 행성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으니까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최 요원은 처음 듣는 신문물의 소식인 듯 생소한 표정으로 류재관을 응시했다. 재구성된 세계에 비해 최 요원의 기억은 아직도 군데군데 멍이 짙어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 꽤 있다. 혹은 정말로 자신이 아니었거나. 최 요원의 기억 속에는 일부를 제외하고 백 년간 있던 일은 대부분 말끔한 백지였다. 하나 아주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백 년의 마지막. 마지막만큼은 류재관보다도 명확할 것이다.

그날 자신이 꾸민 류재관의 죽음은 무엇보다 달갑지 않았다. 직후에 찾아온 봄은 너무나 괴로웠다. 흩날리는 분홍빛은 요사스러웠으며, 그때만큼은 제 곁에 있어야 할 사람조차 없었고, 그건 방금 스스로가 그를 제거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형용을 포기한 어떤 결말 같았다. 지금 이 세계를 얻은 것은 그 일의 연장선이니 당시의 선택을 후회한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으나, 후회와 고통은 별개다. 별개기에 그 두 요소는 배로 찾아왔다.

최 요원은 내린 시선을 따라 저도 같이 무릎 하나를 꿇고 눈을 맞춰 응시한다.

“틀렸다는 건 아닌데, 그래도··· 너무 매정하게 그러지는 마. 조금 더 있다가 와 줘.”

류재관의 어깨를 잡은 손이 팔을 타고 내려가 손끝을 양손으로 감싸 잡는다.

“나름 우리가 지켜서 처음으로 같이 바다도 본 곳인데. 서운하게.”

옅게 미소 지은 최 요원은 류재관에게서 한참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잡은 손에 힘이 미약하게 실렸다가, 이내 살포시 놓음과 동시에 훌쩍 일어난 최 요원은 고개를 떨구지 못했다. 외려 아주 멀리 시선을 뒀다. 저 문 밖으로. 어딘가 말을 아끼는 것 같던 그는 한껏 가라앉은 음성을 흘린다.

“···재관아, 너도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알겠지, 응?”

 

류재관

“······.

이 세계를 쉽게 놔버리겠다는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이곳은 최 요원과 청동 요원이 만들어 낸 창작품에 가까웠다. 오직 두 사람이 원하고 간절히 필요로 했기에 그 긴 시간 동안, 몇 개의 세계를 걸쳐서 공들여 만든 세기의, 아니, 범우주적인 걸작품이자 유산. 하지만 최 요원이 없다면··· 당신이 실수로라도 죽게 된다면,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을까. 결코 자신할 수 없다. 증오스러운 나머지 제 손으로 모든 걸 파괴해 버릴까 두려웠다. 그러느니 차라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이곳을 떠나주는 게, 세계의 입장에서도 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게 청동 요원, 류재관의 생각이었다.

···저 안 죽습니다.

그를 따라 일어서며 류재관도 말했다. 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 최 요원에게 시선을 둔 채. 아직 온기가 남은 듯한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요원님보다 더 오래 살 겁니다. 한 번 해봤는데, 두 번은 못 하겠습니까?

최 요원이 조금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타이밍에 맞추어 이번에는 류재관이 바깥으로 시선을 피했다.

물론 말입니다, 하고 뒤이어 곧바로 전제를 붙인다.

“이건 자연사 기준입니다. 건강관리만 열심히 하면 백 년은 거뜬히 살지 않겠습니까.

평범하게 나이 들어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아주 오랜 시간 둘은 고정된 신체로, 가장 최상의 컨디션을 갖춘 몸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아무리 평범해졌다고 한들, 노화하는 신체인지 아닌지 당장은 모르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진리와 접했고, 심지어는 이계신의 껍데기도 뒤집어써봤던 자들이 정말 한낱 인간과 수명이 동등할지는 이제부터 알아볼 일이다. 그럼에도 류재관은 궁금했다.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은 최 요원은 어떨지, 같은 것이.

···그땐, 철이 좀 드셔야 할 텐데 말입니다.

 



당장 류재관이 제 목숨 하나로 사람을 통으로 바꿔 놓고도 최 요원에게 전하는 말이 너무나 얄궂었다. 아마 거진 백 년 살던 독재자가 한 사람을 족쇄에 묶지 않고 가두는 방법으로 똑같은 짓을 했다면 팔십은 먹고 들어갔을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은 생각도 않고 저에게 죽지 말라는 것은 일종의 미울 수 없는 기만이었다. 그 경악스러운 말들마저도.

“너, 그때 내가 만약 한 번이라도 실수했으면······.”

조금 서러운 마음에 울분이 튀어나왔으나, 이내 거두었다. 지금 제가 지켜냈으니 그거로 됐다. 그렇게 체념을 핑계로 합리화했다. 아무래도 하나뿐인 영웅에게는 주기적으로 시련이 필요한 듯했다. 그래야 계속 영웅일 수 있을 테니. 더없이 나약해진 지금, 제 바다를 내세운 치사한 시련을 주는 것은 또 어떤 수법인지. 야속하게도 어느 세계나 알 수 없는 것은 많았다.

최 요원은 깊게 들이마신 숨을 한껏 내뱉는다. 내뱉는 숨이 어딘가 턱턱 막히면서 갑갑하다. 인간의 몸이 된 이후로 만약에라도 죽음을 실감한다는 것은 두려웠다. 제 죽음이 아니라, 류재관의 죽음이. 거대한 배에 몸을 싣고 바다를 가로질렀을 때부터. 바다를 두고 무작정 차에 올랐을 때부터. 이제 죽어버리면 정말 종장에 닿지 않을까, 하는 끔찍한 상상도 해 보았다. 비슷한 악몽도 심심치 않게 꾸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과연 인간적이었다. 최 요원은 제 목을 한 번 매만졌다.

“···난 철 안 들 거야.”

애초에, 철든다는 것 자체도 잘 모르겠다. 마냥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철드는 것도 아니고, 고생을 해야 철이 든다기에는 최 요원은 그럼에도 여전히 철부지다. 잠시 음울한 기운만 물씬 풍기는 것일 뿐일 터. 나가면 사라질 것이 두려워 아예 나가지 않는다는 선택도 철들었다고 볼 수 없지 않은가. 만약 철든다는 것이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하면, 최 요원은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았다. 우선 그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사건을 이해하거나 용서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일이다. 그렇지 못한 자는 그럴 이유나 여유가 없다. 그는 제 바다를 잃을 수도 있었을 일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용서할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그가 지켜내어 만들어진 것은 이 세계가 아니라 그 바다였다. 스스로가 파괴하고, 스스로가 재창조했던.

“네가 신경 쓸 게 있어야 일찍 갈 마음이 안 들지.”

어디에 홀려 있어도 단단히 매여있는 곳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최 요원이 단순히 바다를 항해하다 못해 간간이 닻을 내리면, 무용지물이 될까 바닷물이 마르는 것을 눈치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럼 마를 겨를도 없을 것이다. 위축된 서글픔은 그를 더 철없게 만들었다.

 

류재관

“···실체가 없는 것들이, 더 무서운 법이지요.

상실감과 공허함. 눈앞의 실체가 없어진 것에 대한, 그 자체로 실체가 없는 감정.
류재관이 무수히, 그리고 긴 시간 겪었으며, 인간 정신을 붕괴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


“······.”

류재관은 최 요원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다. 비단 인간과 인간 아닐 때의 모습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희로애락을 전부 보았다.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가라앉을 수 있다는 건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무리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는 여유를 잃지 않았으니까.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했었으니. 그러나 노력조차 하지 않고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출하는 최 요원은 류재관에게도 낯설었으며, 동시에 놀라웠다.

저 사람도 무너질 수 있다.
저 사람도 주저앉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나라면 감내할 수 있다.
나라고 멀쩡할 리 없으니까.


“요원님.”

그 말과 함께, 류재관은 최 요원이 제 목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잡아끌어와, 류재관 본인의 목 위에 올려두었다. 의문스러운 시선이 따라붙었으나 류재관은 그 손끝이 맥박 뛰는 자리에 잘 닿아있음을 확인하고, 목을 울렸다.

“당신의 불안감을 덜기 위해 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위치 추적기를 제 몸에 다셔도 됩니다. 혹은 연구소가 당신에게 했던 것처럼, 목에 단두대를 거셔도 괜찮습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가 불안감에 잡아먹혀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사느니, 그저 내 하루를 유리구슬 안에 담아 당신 손에 쥐여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나의 머릿속에서 나온 치기 어린 부탁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족쇄를 채우고 싶은 사람은··· 류재관 본인이었다.

“이기적인 마음일 수 있겠지만, 당신은 저만 보셔도 됩니다. 제가, 요원님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힘내겠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자연히 어느 정도 거짓이 될 수 있음을 최 요원도 모르지 않았다. 당장 불안감을 덜기 위해 외출을 거부하던 것을 제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끌고 나오지 않았는가. 최 요원이 현관을 나설 때부터 극심해진 목가의 욱씬거림은 밖에서 아무리 호흡을 반복해도 묻히지 않았다. 류재관의 의도야 어떻든 그건 최 요원이 가장 넘기 힘들어하는 장벽이었다. 그 앞에 최 요원을 막무가내로 던져놓은 것이다.

장벽을 넘어도 집에 비해 익숙지 않은 바깥은 바다를 포함해 너무나 넓어서, 그 방대함이 두려웠다. 밖이라는 개념의 자체가 기이함으로 변질되어 다가왔다. 존재가 우주적인 사람을 지구에서 잃는다는 것은 이해가 닿지 않는 말이지만, 말만으로 그 허무를 증명할 수 있었다. 최 요원은 그 허무의 맛을 직접 본 후에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그 위력은 말로 맺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건 사람을 곁에 머무를 수 있게 하는 게 아니야.”

잠시 상상해 본다. 목에 자신과 같은 단두대를 걸고 지내는 그를. 상상이 깊어지면 왜인지 최 요원은 비참해진다. 류재관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걸 자신의 파트너를 잃고 싶지 않다는 목적하에 직접 채워준다는 것은 어딘가 불쾌했다. 그를 무엇인가로 구속할수록 제가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그렇게까지 하겠는가.

그런 건 가능케 하려는 노력이지,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다. 소원을 줄에 묶는 것처럼, 자신의 일방적인 바람을 상대의 목에 묶거나 거는 거다. 가령 가지고 싶어서 족쇄를 채웠는데 그 결과가 자결인 것과 같이, 상대를 제한할 수는 있어도 완벽히 묶이게 하는 전능한 물건이 아니었다. 최 요원은 보다 더 욕심쟁이였다.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묘사하는 류재관을 어쩌면 이타적이게 만들 수 있을 만큼이나. 그는 전능하지 못한 그런 실체들 없이, 류재관이 자신에게 스스로 매여있거나 그에 준하게 만드는 존재이기를 원했다. 일종의 신념 고착을 바라는 셈이었다. 다시 바다에 홀려서 빠지려다가도 극심한 거부감에 죽지 못하게. 강한 신념은 물체가 하지 못하는 것을 마음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가끔 무엇보다 전능해져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류재관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는 그를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입증하지 않아도 실로 명확한 것이었다.

“네가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제 손 안에서 맥동하는 온기가 절실했다. 최 요원이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류재관 그였다. 류재관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를 만나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면 하루도 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넓게 감싼 손으로 닿아있는 살결을 어루만진다. 생각해 보면, 최 요원의 모든 원동력 끝에는 늘 류재관이 존재했다. 최 요원은 그래서 류재관에게 결속됐다. 다만 결속된다는 것은, 상대도 그러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되도록 노력해 줬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하는 장소에 자신이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

“이미 이룬 거에 더 힘 뺄 필요 없으니까···. 좋아하는 장소 말고, 영원한 장소로 바꿔줘.”

비단 최 요원을 욕심쟁이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류재관

“······.

당신이 무척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가르치고 길러내야 하는 어리고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저보다 몇 년이나 더 일찍이 태어나고 자라 본인만의 삶을 살고 있었던, 완성된 어른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리하여 당신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 자만했던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때.

봐, 지금도 그렇다. 분명 내가 당신을 붙잡아 앞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손아귀에 잡힌 채로 당신만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알기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족쇄나 쇠붙이 따위로 사람을 붙잡아두는 게 하등 쓸모없는 일임을, 이미 눈앞에서 봐놓고도 류재관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제 스스로 목을 그어 도망친 자에게는 속도 없는 천진난만한 소리였구나. 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 만약 최 요원이 자신의 사지에 구속구를 채웠다면. ···류재관도 똑같이 행동했을까.

아 이곳을, 누구 의지로 왔더라?

···답을 깨닫자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나도 참, 당신 말을 지긋지긋하게도 안 듣는군.

“···미고 씨가 보고 감명받았다던 B급 클리셰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에서 연인이 된 두 남녀가 입이라도 맞추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들이 그 고리타분한 연출가조차 뜨악하게 만들 말과 생각들을 거리낌 없이 나누고 있음에도, 류재관은 그 흔한 사랑한다는 고백 하나 뱉지 않고도 그저 최 요원의 모든 것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였다. 그럼 나는 그저 나 하나 돌보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돌보는 것과 진배없지 않겠나. 제 얼굴을 감싼 손에 뺨을 비벼보며 간청하듯 말했다.

“잘, ···모릅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십시오. 바다가 메마른다면 기꺼이 하늘이라도 될 겁니다. 그저, 그저··· 이제 우리가 영속한 삶을 보장할 수 없는데도··· 영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이제 그는 가르침이 필요했다.
그 논리와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아주 편협하게 기울어져 있대도 상관없었다.
우주와 바다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저울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아직 모르니까, 영원할 수 없어도 영원한 것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영원이란 것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웃음이 샜다. 영원이라는 것은 이미 발음한 순간부터 편협한 조건으로 남는 단어였다. 그럼에도 계속 발음하고 싶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절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살아가게 된다면 어떨까. 계속 자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저무는 노을을 보고, 밝은 달을 보고, 트는 동을 보고, 식사를 함께하고, 어쩌면 밖을 보기 싫어서 해나 달은 커튼에 가려져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살다가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세월을 타고 늙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늙는다면, 늙는다면···.

젊을수록 늙기 위해 노력하고, 늙을수록 젊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머리를 오래 굴리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될 수도 있고, 몸의 활동량이 떨어지니 운동을 해야 하고, 하거나 하지 않거나 결국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날도 올 것이다. 그렇게 되어가면, 아마 상대를 놓치기 쉬워지고, 눈을 떼지 않는 것은 더욱 힘들고, 놓치더라도 쫓을 힘이 없을 것이고, 쫓더라도 잡을 힘이 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이 하나둘 휘발돼서 결국 모든 목적의 근원을 일순 잃게 될 수도 있다면.

최 요원은 늙고 싶지 않아졌다.

늙지 않고 살고 싶었다. 영원히.

“우선··· 계속 있다 보면 알게 되지 않을까?”

최 요원은 손 안에 비벼지는 따스한 피부를 한껏 느꼈다. 마음이 어딘가 모르게 조급해진다. 아직 한참 남았지만, 늙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지만. 조급해지다 못해 가슴이 저며왔다. 단 한 시간도, 일 초도 늙고 싶지 않았다. 자연사를 상정하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갑자기가 난무한다. 갑자기 너무나도 아름다워 빠지고 싶은 바다처럼. 어찌저찌 순탄하게 산다고 해도 죽음이라는 건 이 세계에서 용서될 구석이 없었다. 밤마다 새근거리는 간지러운 숨결을 자연스럽게, 때가 되었다는 이유로 거둬간다는 건 잔인하지 않은가. 왜 사람은 죽음을 상정하고 살아야 하는가. 다시 살아날 수도 없는데. 죽어도 죽어도 계속 최상의 상태로 깨어나는 그때와는 달랐다.

“···그때까지 있을 거지, 응?”
류재관

“요원님보다 오래 살 거라고 방금 말했습니다만.

요즘의 최 요원은 외출을 극도로 꺼리고 안전가옥에만 머무르기를 간곡히 바라고 있었으나, 실은 류재관이 오랫동안 최 요원을 주인공으로 두고 그 옆에 자신을 그린, 그 길고 커다란 그림 속에는 아주 다양한 장소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물론, 지금 사는 도시도 나쁘지 않다. 안전지대도 도심이었으니 지금과 큰 차이는 없으나, 평화가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사는 건 또 다른 삶이었다. 크리쳐의 습격 대신 물가 상승을 걱정하고, AOC 요원복이 아니라 셔츠나 후드를 입는 게 자연스러운 곳. 건물 외벽을 타거나 날고 있는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는 대신,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고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탄다. ···류재관은 이런 삶이 제게 허락될 줄 몰랐으므로, 이 또한 행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바닷가 근처라 세찬 해풍이 부는 곳은 어떨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눈부신 아침 햇살에 함께 눈을 뜨고, 다 정돈 못한 부스스한 머리를 내버려둔 채로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아주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리겠지만, 거기서 다시 잠에 든다고 한들 어떠하랴. 해변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가 출출해지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노곤함에 다시 낮잠을 자는 일도 해보고 싶었다. ···물론, 그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을 때나 가능한 일이므로 당장 기대하긴 힘들겠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가는 것도··· 제법 좋을 텐데. 직접 농사를 지어봐도 재밌을 거다. 아주 한적한 마을에서 개나 고양이들을 키우면서 지낼까. 그 해 농사를 망치면 망친다고 한들 원인을 분석하며 실패를 거듭해도 된다. 그런다고 세상이 멸망하거나 누군가 죽진 않으니까. 우리는 마음껏 실패하고, 이따금 작은 성공에도 기뻐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린다 한들 그 캔버스 속에 최 요원이 있었고, 단지 그림이 아니라 언젠가는 사진이 되기를, 류재관은 희망했다. 이 그림 한 점 한 점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으나 시기상조임을 안다. 그래서 류재관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요원님. 이제 돌아갑시다, 집으로.”

그리고 이 책은 사야겠습니다, 하고 덧붙이며 손에 쥔 책을 가지고 계산대로 향했다. 여전히 알쏭달쏭한 눈으로 류재관을 바라보는 책방 주인을 향해 희미한 미소로 화답한 그가 자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책이 든 종이봉투를 최 요원의 품에 안겨주곤 쓰고 있던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아직 오늘이 다 안 끝났으니, 남은 시간 뭘 할지 생각해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