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그어

무제 (1)

RJG 2025. 7. 12. 17:08
류재관

평화로운 세계는 여전히 어색하다. 물론, 평화의 기준을 크리쳐의 존재 유무로 결정지을 순 없다지만, 세계 멸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제거된 세계 속에서 류재관은 더 이상 한 사람을 제외하면 청동 요원으로 불릴 일이 없을 터였다.

누군가 편의를 봐준 덕인지 몰라도 이미 두 사람 모두 복역을 마친 민간인이었으며, 나이 또한 원래 살던 세계와 동일했다. 놀라운 점은 통장에 찍힌 재산의 액수가 생각보다 많았다는 것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찍혀있는 액수가 AOC에서 받던 생명수당금과 일치했다. 어떤 조물주 내지 상위 존재의 농간일까. 아마 그들과 제대로 조우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을 터였다. 아니, 만나고 싶지도 않다.

“······후.

짧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서 내려와 누워있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아직 옆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는 이의 존재는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막 깊은 잠에 든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류재관도 알고 있었다. 지난 여행 이후 며칠 내리 저 사람은, 류재관이 자는 동안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위에 빠져 죽을 바다 따위 없는데도 말이다. 당분간은… 공원 호수 근처도 가지 말아야겠군. 이러다 받아둔 목욕물도 불안하다고 할 기세였다.

이미 그 호텔과 멀어졌을 때부터 이틀 내리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내내 저를 괴롭히던 목소리는 들리지 않건만, 그럼에도 당시 느꼈던 강렬한 감정의 잔상에 대해 곱씹게 된다. 어쩌면 주술이 아직 유효한 건 아닐까. 나는 왜 그 바다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나의 바다는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고작 그런 하급 주술 따위에게 휘둘릴 정도의 나약한 정신력으로 나는 이 사람 옆에 설 자격이 되는가. 그게 저의 머리를 무겁게 만들었다.

“······.”

일단, 씻고 아침부터 차리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창가로 가 빛이 들어오는 커튼을 당겨 방을 더욱 어둡게 만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이제야 잠에 막 빠져든 사람은 아마도 그와 동시에 심해 속에 있던 정신이 해수면으로 다시금 떠올랐을 것이다.

세계의 기승전결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에서도 여전히 한 사람에게 요원으로 명명되는 이는 멸망할 세계 속보다도 평화로운 지금에서야 신경과민을 거하게 앓았다. 불행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 있다는 것. 즉, 행운이 있다는 것은 불행 또한 있다는 것. 행운 같은 이 세계에서 떠난 2박 3일간 거센 파도처럼 덮쳐왔던 불행들은 최 요원이 아직도 그 바다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최 요원이 바다와 멀어졌음에도 바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사실이다. 잠에 들면 깨어나서 후회할까, 잠시 두면 다시 와서 후회할까. 그의 인생은 이제 전과 다름이 없다. 무엇을 선택해도 결국 더없이 후회스럽고, 가깝고도 먼 미래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착각은 밀물처럼 끝도 없이 생각을 잠식시킨다. 그 안에서 질식한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수도 없이 떠오른다.

류재관이 방 밖으로 나서기 위해 발걸음을 떼고 나면, 그 이후부터 목이 끊어져라 저릿거린다. 잠든 지 얼마나 지났던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둑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아침을 느끼며 차마 여유로운 척 방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다면 진즉에 일찍 눈을 붙였을 터다. 좀처럼 젖은 듯 움직일 생각이 없는 몸은 위기감이 휘두르는 정신에 의해 문을 뜯어내는 행색으로 열어젖힌다.

“하······.”

당시를 제외하고 늘 그렇듯 번듯이 서있는 류재관을 확인하고 나면, 그때처럼 탁 풀리는 맥을 견디고 피로함을 한껏 담은 숨을 뱉어낸다. 이것도 참 고질병이 된 것이 분명했다.

 

류재관

“······?!”

등 뒤에서 나는 커다란 소리에 신중하게 계란을 뒤집던 손이 그만 삐끗한다. ···아, 내 노른자. 봉긋하던 노른자가 터져 느릿하게 퍼져가는 꼴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류재관이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거기에 최 요원이 서있었다.

“···왜 벌써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가 준비되면 깨우러 갈 생각이었는데. 어슬렁 다가오는 인물을 조금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지그시 응시하다 한 가지 깨닫는다. 식사량이 줄어든 게 아닌데도 어쩐지 몸이 전보다 마른 듯했다. 보양식을 먹여야 하나. 다시 몸을 바로 하며 계란을 마저 뒤적였다.

“가서 세수라도 하고 오십시오. 금방 준비됩니다.

그리 말하는 손이 조금 더 분주해진다. 타이밍 좋게 끓기 시작한 국의 간을 보고, 밥솥에서 밥을 퍼서 담고,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식탁 위로 늘어놓고 나면 마지막으로 식기를 놓는다. 허술할 순 있어도 반찬 투정할 건덕지는 없으니··· 잘 먹겠지. 류재관이 먼저 식탁 앞에 앉는다.

 



다른 의도였을 류재관의 원망 어린 눈빛이 일순간 써늘하게 최 요원을 격타한다. 여러 세계에서도, 심지어 이 세계에서도 그 눈빛은 어느 의미로나 최 요원에게 익숙하지만 적응될 기미는 없다. 묵묵히 홀로 바빠지는 류재관을 뒤로하고, 최 요원은 한 마디 대답 없이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최 요원은 세면대를 붙잡아 겨우 피로한 몸을 지탱한다. 차가운 물을 손에 담아 얼굴을 적셔도 정신이 깨어나질 않는다. 최 요원은 그날 이후로 항상 유사 정신적 각성에서 깨어난 적이 없다. 잠이 모자라고 아무리 피로해도 불규칙적인 단 한 사람만을 이유로 깨어났다가는 눈 뜨고 코를 베일 것이다. 하나 어색한 점은 코를 베어낼 칼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겪어본 사람은 이해 가능한 흔한 환상통이었다.

제 목가의 불분명하면서도 명확한 위기감의 야속한 점은, 최 요원의 시야 안에 류재관이 들어오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잠에 드는 동안 류재관이 곁에 있더래도, 최 요원이 그날의 꿈을 꾸는 날이면 예외가 없었다. 그 꿈을 꾸면 목이 다시 끊어질 것만 같은 통증에 잠에서 깨어났으며, 깨어나서 현실의 류재관을 목도하면 멀쩡해지고를 반복했다. 이 덕에 최 요원에게 잠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피로해지는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

최 요원이 식탁으로 몸을 옮기면 그곳에 류재관이 앉아 있다. 당연하게도 목에 남아있던 영문 모를 근질거림은 사라진다. 그 잠시를 두고 시야에 없었다는 이유로 저도 모르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맞은편 자리에 몸을 앉힌 최 요원은 놓인 식기를 쥐는 것과 제 앞에 앉은 류재관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별도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한 적은 없으나 입맛이야 있을 리가 만무했다.

 

류재관

늘상 웃고 다니던 사람에게서 미소가 사라지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는 이 사람이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고 가벼울 때에도, 태산처럼 듬직하고 무거울 때에도 곁에 있었지만, 이럴 때엔 그의 무게감에 관해서 종잡기 힘들었다. 이래서야··· 당신을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나. 류재관은 또 저를 응망하는 시선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곤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요원님, 안 드십니까?

썩 내키지 않아 먹지 않겠다 답해도 어떻게든 설득해 억지로라도 먹일 기세였다. 그 질문을 건네고도 한참 묘한 침묵이 식탁을 웃돌더니, 결국 짙은 한숨을 삼킨 류재관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 밥과 국을 떠먹는다. 그리고 반찬 두 어가 지를 최 요원의 밥 위로 올려주며 여상스러운 투로 덧붙인다.

아침 다 먹으면 같이 산책이라도 갑시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지금 며칠째 집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씀하시고요. 물론, 대중교통으로 갈 겁니다. 그리 덧붙이자 또 묘연한 시선이 날아온다. 최근까지는 외출만 하려고 하면 또 그때 같은 표정으로 팔을 붙잡아오니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기필코 저 사람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리라. 류재관은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다시 묵묵히 밥을 펐다.

 



최 요원은 사실상 아무런 병도 앓지 않았건만 맴도는 후유증은 섭식이나 대화를 직접적으로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섭식이나 대화를 함에 있어 필요한 힘을 앗아갔다. 류재관의 말이 대답할 가치가 없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대답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대답하는 것이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최 요원이 고안한 가장 편한 방법은 시선이나 침묵이었다. 제아무리 힘이 없어도 걱정이 그칠 날 없는 눈을 대상에게 굴려두는 것은 쉬웠다. 그건 최 요원의 자의가 아니라 보호 본능을 통해서라도 기어코 류재관에게로 움직였다.

시선을 한참 두고 있으면, 별 다른 대답 없이도 모든 것이 류재관에 의해 진전된다. 류재관이 먼저 식사를 시작하고, 제 앞에 놓인 그릇에 반찬이 올라온다. 그 과정이 끝나고서야 최 요원도 가라앉은 눈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류재관이 몸소 보여주지 않아도 훤하기에 식사 자체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최 요원은 이 식사마저 버거웠다. 그가 하는 건 식사가 아니라 식사에 준하는 어떤 일일 터다. 뭐가 들어오나 씹고 삼키기만 하면 되는 그런 지루한 일에 비견됐다. 하나 마나인 짧은 수면도 마다하고 깨어나서 하는 것이 식사가 아니라 일이라면 버거운 것은 당연하다.

“······.”

그보다 더 버거운 것은, 아무래도 식사라는 일보다 그 너머에 있는 사람이었다. 류재관은 그 3일간 자신이 한 일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최 요원에게 그 3일은 지독하리만치 선명하게 남았다. 그 일의 당사자가 저렇게나 태평하니 최 요원은 마음 놓을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일상과 같다는 점에서, 밖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초조한 건 최 요원 자신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발목을 놓질 않는다. 최 요원은 이제 식사조차 포기한 채 수저를 내려놓았다.

“······어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얼굴을 쓸어내린 최 요원은 피곤한 기색으로 단 세 글자를 겨우 뱉었다. 나가기로 마음을 고쳐 먹거나 바깥에 구미가 당긴 것은 아니었다. 외출하기 위해 하는 청유나 회유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지금조차 류재관의 말은 최 요원의 의지를 바닥까지 끌고갔으므로. 그저 눈치를 핑계로 형식적인 답변을 내놓았을 뿐이다.

 

류재관

기나긴 정적 속에서 겨우 돌아온 오늘의 첫 마디였다. 아니, 저건 말이 아니라 한숨에 가깝지 아니한가. 매일 귀가 따갑도록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어느 죄수처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의 음울하고 어두운 음성이다. 순간 울컥해 고개를 쳐들고 대꾸했다.

“···원하시는 행선지가 없으시면, 제가 알아서 정할 겁니다. 준비나 제대로 하십쇼.

어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굴지 마시고.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으나 쏘아보는 눈빛에 그 의미가 충분히 담겨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열불이 끓는 와중에도 최 요원이 그릇을 다 비우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빈 그릇들을 빼앗듯이 전부 가져가 싱크대로 향하는 그였다. 다시금 등으로 꽂히는 시선은 애써 무시하며.

***

“···후.

신년이다. 그런 일이 있고 고작 며칠 만에 해가 바뀌었다. 평화로운 세계에서는 신년을 이렇게나 특별하게 강조하는구나. 나이 먹어가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오던 탓에, 어디엔가 제 인적사항을 적어야 할 때면 속으로 제 나이를 역으로 계산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건 제 옆에 서있는 사람도 비슷하겠지만. ···아니, 아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온 탓에 우리 모두 나이라는 개념에 퍽 익숙하지 않았다. 육체의 나이가 아니라 정신이 버텨온 삶을 세다 보면, 고작 서른몇이 아니라 세 자리가 아주 훌쩍 넘어갈 테니까.

[이번 역은 —, -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저희 곧 내려야 합니다. 멍 때리다 놓치지··· 마십,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 가운데 나란히 서있던 두 사내가 순간 눈을 마주한다. 최 요원의 눈을 보자마자 류재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아, 말실수를. 하필 그가 민감하게 반응할 단어를 꺼냈음을 인지한다.

시··· 오.

젠장. 문이 열리기 무섭게, 최 요원의 손목을 잡아 성큼성큼 걸어 망설임 없이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아직 지나지 않은 겨울의 찬 공기가 폐를 콕콕 찔러댄다. 그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최 요원에게는 이 공기가 그리웠던 적이 없으니 오랜만이라는 감상도 들지 않았다. 뺨이 얼어붙는 느낌과 냉혹하기만 한 추위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다. 그게 그가 나와서 느끼는 전부였다.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놓치기 쉽다는 것. 최 요원은 밖으로 나온 이후부터 피로한 정신으로도 류재관에게서 시선을 뗀 적이 없다. 그 피로한 몸을 이끈 것은 류재관이지만, 피로한 정신을 일깨워주는 것 역시 류재관이었다. 잠시 스친 말에 머리가 미친듯이 번뜩거린다. 아무런 미동 없이 정직하던 최 요원의 얼굴은 미묘하게 구겨져 류재관을 응시한다. 놓고 싶지 않은 게 누구인데. 놓치기 싫어서 나오지 않은 걸 내보낸 건 또 누구인데. 놓칠 게 따로 있지. 놓치고 싶지 않았으면 왜 여기를? 말로써 꺼내지진 않지만 생각으로서 감정이 일렁인다.

“···안 잡아도 돼.”

내가 알아서 잡을 수 있으니까. 일렁임이 만든 파동은 행동으로서 표출됐다. 최 요원은 잡힌 손목을 류재관의 손아귀에서 홱 빼냈다. 잡힐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본인이 잡혀있는 처지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여태 잡아온 것이 그라고 해도 지금이라면 말이 달랐다. 지금 최 요원의 넋은 도통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지만, 하나에 끔찍할 정도로 몰입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상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최 요원은 단 한순간도 정신을 차리지 않은 적이 없었음에도 그 사람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은, 그냥 속만 상할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 말을 들었다는 점에서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다.

 

류재관

“······.”

인정한다. 명백한 나의 실언이 맞다. 요 며칠 저 사람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원인 또한 그 기이한 바다에 홀려 정신나간 짓을 했던 류재관 본인의 과실이었다. 그러나 이걸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나? 당시의 기억은 흐렸으며, 듬성했다. 하지만 정신이 들 때마다 괴로움에 일그러진 당신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슬퍼 보였다. 두려워 보였다. 절박해 보였다. 그리고, 화가 나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류재관 역시 이미 뼈저리게 느낀 바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나의 괴로움과 당신의 괴로움은 같지 않다. 그러니 이해한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 옆에 잘 붙어계십시오.

쏟아지는 인파 사이에 휩쓸리지 않도록 최 요원의 주변으로 공간을 확보하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이곳, 아는 곳이구나. 천천히 역사 내부를 훑는 시선에 미묘한 그리움이 담긴다. 그도 그런 것이 최 요원과 바로 이곳에서 그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가.

그때와 같은 장소. 다만 이번에는 정반대의 위치. 내려다보는 사람과 올려다보는 사람이 뒤바뀐 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당신의 눈에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보일까. 그때와 지금 사이에 억 겹의 시간이 쌓여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가면 안 돼? 크리스마스에는 바다 잘 안 가나?」
「크리스마스 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안 잡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서로의 바다가 되었는데.

“역시 잡고 싶습니다.

과감히 내뻗은 손이 상대의 손목을 다시금 쥐었다. 차게 식어있던 피부끼리 맞닿은 자리가 아주 조금은 데워진다. 또 뿌리쳐도 잡으면 그만이다. 나는 이 손으로 당신을 수 십, 수 백번 살해했었고, 또 소생한 당신을 일으켜 세웠었고, 그 반대의 입장도 되어봤으며, 마침내 세상을 구해봤으니까.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