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25. 06. 29) 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 3부 <적도편동풍을 타고 영원으로 가자>
RJG
2025. 6. 29. 02:15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은 / 지나온 사막은훼손이 아니었으므로 무엇도 우리를 부술 수 없었어 나는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았어
들어, 살아서 이야기할 거야, 어떤 구전은 기록보다 강력하니까오늘 우리는 길었던 고통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될 거야

KPC 류재관
PC 최
Date 2025. 05. 08

선택권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 동측 전선.
그림자가 사라진 남회귀선의 정오.
사막의 전투는 보통의 전투와 달리 낮에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활동은 해가 떨어진 이후 시작된다.
이곳에서의 오후는 다른 지역의 새벽과 같다.
그러니 착륙장에 조용히 도착한 헬기 한 대는 말하자면 야음을 틈탄 것이다.
4개월간의 별도 특수 작전을 마치고 본진으로 복귀한 류재관과 최의 헬기였다.
류재관은 해방군이 사용하는 특수 스마트워치에 대고 조용히 보고한다.

실제로 편제된 이름을 밝힐 수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는,
해방군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두고 모든 병사들은
이 부대를 그저 ‘바로 그 부대’ 라고 불렀다.
어느 옛날 뉴욕이 그랬듯이, 통용된다면 굳이 다른 별명을 붙일 필요가 없다.
헬기에서 내리자 익숙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릴리안 웨즐리:충성. 고생 많으셨슴다. 짐 이쪽으로 주십쇼. …소령님 다치셨습니까?
많은 사람이 변했다.
전쟁은 너무 다양한 것들을 변질시킨다.
릴리안 웨즐리는 그런 일들의 표상 같은 존재다.
키가 10cm 넘게 커선 뺨 한쪽에 큰 흉터를 달고 고글을 쓴 군인에겐
더는 수줍어하던 소녀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류재관과 최는 나미브 북측 전선에서 작전 하나를 수행하고,
적군 특수부대 두 개를 섬멸한 후 막 비밀리에 돌아온 참이었다.
류재관은 헬기에 채워 두었던 에너지 파동 감지 스텔스 장치를 풀어내고,
릴리안은 개조 워치에 두 사람의 도착 소식을 한번 더 알렸다.
해방군은 정부 지급 스마트워치를 사용하지 않게 된지가 오래였다.
4개월만의 만남이다. 릴리안에게 그간의 근황을 물을 수 있다.

릴리안 웨즐리:개좆 같은 새끼들이 우리 애들을 전깃불에 튀긴 쥐처럼 만들어 놨습니다.
…왜 그러심까? 저라도 먼저 개새끼 소새끼 해주지 않으면 우리 소대 애들은 속편하게 욕도 못 뱉고 어떡하겠습니까!

릴리안 웨즐리:일단 이쪽으로 따라오십쇼. (짐 두 개를 훌렁 들처매고 사령부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래도 사령부 막사는 깨끗함다. …주변 너무 둘러보지 마십쇼.
희미하게 식사 짓는 냄새가 났다.
온실재배에 성공한 다카르의 곡창지대는
불행 중 다행으로 해방군 병사들에게
그럭저럭 먹고 죽지는 않을 만한 군량을 제공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와중에도 장교들은 와인 한 잔씩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류재관과 최의 몫으로 세운 막사 텐트로 안내하면서
릴리안은 주변 보급관에게 부탁해 샴페인을 가져오게 했다.
릴리안 웨즐리:(최 맞은편에 앉아 짧게 깎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길게 한숨을 쉰다.) 아군 사망자 총집계 422명입니다.
비각성자 일반병 소대 두 개가 모래폭풍에 휩쓸렸는데, 그때 상대측 X각성자를 맞닥뜨려 에너지 파동을 그대로 맞았답니다.

릴리안 웨즐리:모래폭풍 때문에 감청이 끊겨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우리처럼 믹서기에 갈리지는 않았습니다.

릴리안 웨즐리:오늘 격전이 있었으니 앞으로 이삼일 간은 전투가 없을 거라는 사령부 예측이 있었슴다.
그 말에 류재관이 눈을 굴려 멀리 서쪽을 본다.
그의 눈동자 위로 황금색의 나침반이 새겨지며, 그 주변이 에너지로 출렁였다.

암습할 계획도 없어 보이고, 각성자 부대는 소대 단위로 4개 정도입니다.
류재관의 설계는 이제 극한까지 기적에 잇닿아 있어서,
촘촘히 깐 그물망 같은 에너지 흐름 추적으로 적의 동태마저 살피곤 했다.
최는 최대로, 류재관은 류재관대로 강해진 결과가 여기 있다.
생존이 헛된 농담이 된 시대에,
바깥 막사 병사들은 부상으로 신음하고 있을 텐데도
시선을 마주하면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다.
해가 점차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THE UNIT
막사를 나오니 오후의 햇살이 무심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령부에 들러 브리핑을 듣기로 한 저녁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다.
진지를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은 사령부 근처,
그중에서도 가장 심층부의 장교 막사이므로
진지를 제대로 둘러보고 일반병들을 살피려면 바깥쪽으로 더 나가야 할 것이다.
병사들의 단체 막사
막사에는 몇몇 병사들이 누워 자거나, 앞에 불을 피워 놓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하사관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다가도
최가 지나가면 입을 딱 다물고 경례를 보낸다.
경탄의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도 있었다.
한 병사가 단체 막사 앞에 앉아 발에 칭칭 감은 붕대를 풀고 있다.
무엇을 하는 것일까?
병사들의 생활을 파악하려면 대화를 해 보아도 좋겠다.

병사:(발에 감은 붕대를 풀다 말고 최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선이 차차 올라가며 상대가 누군지 확인하던 무감동한 눈은 그의 얼굴에 닿자 튕기듯이 놀라 일어난다.) 충성! 2보병연대 3대대 독립중대 1소대 분대장 마키 허셔입니다. 아. (그러다 중심을 잃어 휘청거린다.)

붕대가 반쯤 풀려나간 발은 참혹했다.
푸르고 검게 썩어 들어간 동상 같은 흔적이 발등의 절반을 뒤덮고,
엄지와 검지는 아예 잘려 나갔는지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발에선 심한 악취가 난다.
병사 마키 허셔:죄송합니다. 저, 참호전이 있었습니다. 아직 소식을 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전선이 고착화되니 참호를 파고 밤새도록 전선을 지키는 방식의,
1차 대전 무렵에나 유행했던 전투가 지속되었던 모양이다.
구덩이에 물이 고여 찰박거리는 전투화를 신다 보면
참호족이라는 병에 걸리는 병사들이 많았다.
의무병들이 매번 잔소리를 하고 예방책을 내놓았지만,
모든 병사들을 관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병사 마키 허셔:…의무실엔 이미 다녀온 겁니다. 처치를 받았슴다. 지금 의무실 병상이 포화 상태라……. 여기 보이십니까? (손목에 찬 띠를 보여 준다. 초록색이다.) 트리아지 그린입니다. 저같이 가벼운 증상은 발이 다 썩어 잘려나갈 처지가 아니라면야, 잠시 다녀오는 정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병사 마키 허셔:아프긴 해도 운신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간혹 치유 능력을 가진 각성자 분들이 아예 싹 낫게 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의료 로봇이나 약이나 다, 요즘은 기술력이 좋지 않습니까? 낫는 건 금방 낫습니다. 낫지 못해도 어쩌겠습니까?
전쟁에 나왔다가 팔다리 한짝 잃는 것도 다 자기 운입니다. 하지만 저희 같은 놈들은 치료 자체가 별로 반갑지 않습니다. 실력 좋은 의사와 치유 각성자가 붙어서 사흘만에 낫게 해주면, 사흘만에 도로 전선으로 나가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기죽는 성격도 아니고, 발가락 두 개 정도야 의지를 달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징집되어 온 어린놈들은 울면서 집에 보내 달라고 합니다. 자유롭게 참전한 병사만 있지가 않습니다. 내전이 되다 보니 이쪽 편 도시들에서도 사람을 닥닥 긁어 징집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놈들이 혁명이고 자유고 뭘 알겠습니까. 전쟁 자체가…… 전쟁 자체가 끝나야 합니다.
병사가 이토록 위험한 말을 최에게 하는 이유가 뭘까?
그는 간절히 당신을 보고 있다.
마치 거대한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기적이 된 천사를 보듯이.
대명사로 지칭될 수 있는 고유명사에게 무릎을 꿇고 빌고 싶다는 얼굴로.
그때, 멀리서 릴리안이 뛰어 온다.
릴리안 웨즐리:이 대위님! 시간 남으시면 이쪽 자재 창고 좀 봐 주십쇼! 오염이 심해서 대위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 병사는 여전히 간절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대단히 뛰어난 몇 사람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까?
류재관과 최는 이미 어마어마한 공훈을 세웠다. 하지만…….
릴리안이 무례하게도 상관을 닦달해 창고 수리를 하는 동안,
어느덧 해가 저편으로 기울었다.
이제야 활동하기 좀 편한 기온이 되었다.
선전포고
약속된 시간, 두 사람은 사령부 막사로 향했다.
수뇌부가 머무르고 있는 것치고는 검소한 막사 안에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회의 탁자가 있다.
상석에는 해방군 총사령관이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참모 요한 에를리히가 보였다.
총사령관:왔나. 앉게. (두 사람의 경례를 받고 손수 의자를 빼 준다.) 고생 많았어. 다친 곳은 없고?


두 사람이 자리에 앉는다.
복귀하면서 두 사람은 ‘극비 작전‘ 이 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보안을 우려해 상세한 내용은 전달받지 못했다.

…모두 알만한 이야기지만 정리 차원에서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총사령관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공화국은 X각성자를 무한히 생성해 재공급했다.
치유계 각성자들까지 미친듯이 투입해 빠른 전선 복귀 시스템을 완성했지.
반면 우리는 여기서 더는 병력을 긁어모을 수 없어. 다카르도 이 이상의 군비 지출은 난색을 표하고 있으니까. 이대로는 안 돼. 이 인원으로 전쟁을 끝내야 한다.
우리는 스와콥문트로 향한다.
총사령관:(말을 받았다.) 재작년에 결국 스와콥문트로 대통령궁이 이전된 것 기억나나?
총사령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전쟁 중이라는 사유로 결국 종신직 대통령이 된 로멩 바투타의 대통령궁이 스와콥문트로 이전되었다.
공적인 사유는 신변 보호였지만, 실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총사령관:(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대강 추측할 거라 생각되는군.
어쨌든 전선을 여기까지 끌어당기는 데에 성공했으니 지금이 적기라네. 대통령을 인질로 붙잡아 협상을 요구할 작정이야.
설령 생포에 실패하더라도 그 도시를 함락시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고, 찾아볼 정보도 있을 테지. 자네들이 이야기해준 게 많지 않은가. 에를리히 군이 찾아낸 것도 있고.

우리는 정부가 하늘길 시스템을 수상한 곳에 쓰고 있다고 이미 잠재적 확인을 거쳤지. 그 하늘길 시스템의 서버 신호 전파가 스와콥문트 방향에서 감지되고 있다.
총사령관:그런데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어…….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거야.
정찰이 필요해. 우리는 근처에서 끌어모을 수 있을 만큼의 병력을 끌어모아 대기하고, 두 사람이 먼저 침입해 길을 열어 주길 바란다.

그래서 내일, 그들의 핵심 군단 두 개를 투입해 우리 잔존 병력을 쓸어버리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간의 패전은 작전상 후퇴였다. 흩어져 있던 적 병력을 일부러 이쪽으로 모아 오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어.
그러니… 두 사람이 내일 전투에서 할 수 있는 한 적측 핵심 군단을 섬멸해야 해.
그렇게 해서 적군 병력을 크게 약화시킨 다음 스와콥문트로 침입한다면, 적측은 한동안 정신이 없어 쫓아오기 힘들겠지.
전달 사항은 여기까지. 질문 있나?

(최에게 눈짓한다.) 이 대위는 있습니까?


그 말에 두 사람은 각 잡힌 경례와 함께 사령부 막사를 빠져나온다.




그럼 더 계급 높은 사람이 쉬는 거로 하자.

계급으로 찍어 누르면 형이... 좀 조용해질까.





전혀 통쾌하지 않은 방식의 스테일메이트
작전 개시까지 두 시간. 옷을 갖춰 입어야겠다.
더는 군인 제복도 입을 수 없고,
해방군의 대다수는 부족한 물자 탓에 어디 지나가는 도적떼 같은 꼴이었으나
그래도 장교는 그래선 안 됐다.
그때 막사마다 설치된 안내 스피커에서 경보 소리가 울리며,
새빨간 조명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찰조에서 본진에게 알림. 적군이 접근하고 있음.
반복. 적군이 접근하고 있음.

전투복을 모두 갖추고 오라는 명령을 던지며 류재관이 대응했다.
탄창이 필요 없는 권총,
탄창이 필요한 권총을 가리지 않고 허리와 허벅지에 차며 방어구를 빠르게 걸쳤다.
동시에 막사 문을 열어젖힌다.

사막에서의 전투인 만큼
양자간의 전투는 언제나 적어도 해가 진 뒤에 개시되도록 암묵적 합의를 맺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 작전도 20시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인데, 적이 기습을 해왔다.
어차피 20시 예정이었던 출격이 몇 시간 앞당겨진 것뿐이다.
아군은 진작부터 진형 배치를 시작하고 있었고,
새삼스럽게 혼란이 와 규격이 흐트러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휴식을 방해받은 데다 뜨거운 날씨에 전투를 시작한다는 사실에
열받은 병사들의 사기만 되려 올랐을 뿐이다.
두 사람은 모래바람을 헤치며 서걱서걱한 땅을 밟고 이륙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두 사람과 한영, 그리고 그 설계자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이한영:오셨습니까. (류재관에게 먼저 인사하고, 최에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타십시오. 띄우겠습니다.
급하게 닦아 놓은 이륙장이라 소음도 바람도 심했다.
한영의 이능력이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니,
활주로 같은 게 굳이 필요치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헬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민간인은 탑승조차 불가능하여 본 적도 없는 헬기를,
한영이 어찌어찌 조종법을 익히고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기실 지난 몇 달은 류재관과 최의 작전 수행 완료와 동시에
한영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영과 설계자는 조종석에, 두 사람이 뒷좌석에 타 헤드셋을 걸쳤다.
스텔스 차폐막 드론이 붕붕거리며
작은 에너지 장벽으로 헬기 전체를 감싸 소리와 형상을 죽였다.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지위를 무시하는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필승 권장 수칙‘ 같은 것을 명문화할 수 있다면
‘재앙의 날‘ 이후 그런 문서는 모조리 수정되었으리라.
아프리카 공화국 영토에 존재했던 허브 공항은 대다수 무너졌고,
시민들에게 정밀한 방위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국가는 새로운 공항 건설을 허용하지 않았다.
공군은 지극히 극소수 편제로 구성되어
사상검증을 철저히 받은 사람들만이 조종간을 쥘 영예를 허락받았다.
국가 방침이 그러한 데다,
애초에 아프리카 공화국 영토 내에선 고공에서의 타격이 불가능했다.
툭하면 모래폭풍이 불고 낙진 같은 비가 쏟아지는데
시계 확보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습이 가능할 리가 없다.
양자 모두 공습에 투입할 인력이나 군용기도 없었지만,
있다고 쳐도 장벽 바깥에선 앞이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도시를 습격하자니 자국민을 참살하는 꼴이 되는데
어떤 정신 나간 지휘부가 그것을 승인하겠는가?
그러나 공중전이란 개념 자체가 상실된 이 우스운 시대 속에,
요한 에를리히는 작전 개시를 선언하며 말했다.

폭탄을 떨어트릴 수 없어도 공중전은 가능해. …스러진 병사들의 목숨값을 대납해 주도록. 류재관 소령, 이강헌 대위.
헬기는 묵묵한 재앙을 품고 적진 위로 날아갔다.
지상에서는 보병들이 부딪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모래 먼지가 피어올라 시계가 확보되지 않았다.
그나마 류재관가 깔아둔 설계가 청사초롱처럼 앞을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보병들의 전황이 격렬하고,
독립 중대 두어 개가 모래능선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적진에선 하늘의 변화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한영의 설계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조심스러운 질의가 이어진다.
: 이제 문 열겠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미친 작전.
고공에서 헬기 문을 열고,
두 사람은 오로지 한영의 구현에 의지해 허공을 걷는다.
헬기 안에서 설계와 구현을 펼치기엔 한계가 있으니까.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신처럼 활보하면서… 적을 섬멸해야 한다.
어떻게 섬멸하는가는 두 사람의 몫이었다.
정말이지... 난처할 정도로 푸른 하늘이었다.
: 열겠습니다!
그리하여 문이 열렸다.
펄럭거리는 고공의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옷소매 사이로 펄럭여 피부를 긁었다.
류재관은 망설임도, 겁도 없이,
마치 달로부터 지구까지 투신하듯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다.
최의 손을 꽉 잡고.
한영과 설계자의 이능력이 두 사람을 감쌌다.
연한 노란색과 연두색이 교차하며 발밑을 받쳐 주는 것이,
이제는 사라져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봄의 풀밭을 밟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섬멸할 것인가는 두 사람의 몫이라고 했다.
허공에서 적을 죽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권능 같은 이능을 지녔다고 해도,
고작 두 사람이 수천, 수만 명을 해치울 수가 있겠는가.
무선 이어폰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난다.
릴리안의 고함 소리로 추정되는 것이 얼핏 들렸다.
해방군의 핵심 전력인 두 사람과,
중력을 다룬다는 중요한 이능력을 가진 한영 페어가 동시에 떠나올 수 있는 까닭은
다 릴리안 웨즐리 덕분이었다.
설계자도 없는 그가 어떻게 아군 진지를 홀로 방어하고 있는지 이야기할 여백이 있을까?
모르겠다.
전쟁은 사람의 역사를 하나하나 지우고,
또 새롭게 쌓아 올리는 과정이다.
영웅은 탄생하는 것 자체로 발아래에 수많은 시체를 밟아 건너는 일을 행하므로 영웅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끝내야 해.
더는 원군도, 보급도 없어.
딸랑.
청동 방울의 맑은 울림이 귓가에 닿았다.
류재관이 손을 들어 에너지를 끌어올린다.
손가락 하나 닿는 것만으로도 삿된 것을 일부 정화할 수 있을 만큼,
정순하고 맑은 에너지가 일렁인다.
그것이 최와, 그 손바닥 위에서 피어오른 도깨비불을 감싸면,
비로소 활로가 뚜렷하게 보였다.
✷ 이능력 판정 ✷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98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허공에 띄워진 여러 개의 작두가 가차없이 악인을 처단했다.
푸른 빛과 황금 빛이 산과 강을 그린다.
황금 실로 지어진 들짐승들이 튀어나와 악한 것의 목을 물어 뜯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푸르스름한 안개가 빛을 뿌리며 지나가는 것 정도로 보이리라.
적군이 괴이한 형상으로 쓰러지고,
극비 작전을 알고 있었던 장교 몇 사람이 넋을 놓고 하늘을 보자
휘하 병사들도 자기 중대장이 왜 저러나 따라 고개를 들었다.
황금색의 설계가 깃털처럼 나부끼고,
두 사람은 설계를 밟고 서 있다.
눈앞에선 적군들이 영문 모를 조화로 쓰러져 죽어간다.
눈이 돌아간 아군 병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시체를 밟고 진격했다.

해낸 것 같죠.


하늘을 밟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긴 합니다.






그럼, 돌아갑시다.





권능과 저주
그날 아프리카 해방군은 몇 달간의 패배를 완전히 뒤엎는 대승을 거두었다.
적군 4만명 중 1/3이 사망하거나 전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각지에서 들어오는 보고를 정리하며 요한 에를리히는 무덤덤한 낯빛을 했다.
보고를 마친 류재관과 최는 막사로 향했다.
앞에 릴리안이 서 있었다.
릴리안 웨즐리:단결. 고생하셨슴다. 소령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지 말임다.





릴리안 웨즐리:예? 예 그냥 넋두리나 좀 풀러 소령님 귀찮게 하러 온 건데 말임다. 이런 얘기 잘 들어주실 분이시잖슴까.



그럼, 이 앞에서 대화 나눌 테니... 형 먼저 막사에서 쉬고 계십시오. 저도 따라 들어가겠습니다.


릴리안 웨즐리:오늘 수고 많으셨슴다!
그 뒤, 류재관과 릴리안은 막사 문 옆의 의자에 나란히 앉은 듯하다.
와인 따는 소리가 들린다.
간단히 씻고 나온 후에도 여전히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병사는 물론 많았지만,
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모래가 시체를 덮어 신원조차 파악하기 어렵게 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바깥에선 따뜻한 바람이 불고,
펄럭이는 막사 문 사이로 나직나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릴리안 웨즐리:그때 기억나심까? 저 살아 돌아왔을 때 말입니다.

릴리안 웨즐리:그때 제가 소대장이었는데 말입니다. 아래 200명 애들을 다 잃어버리고 혼자 고립되어서 무너진 건물 안에 갇혔습니다.
적 각성자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바람에 그렇게 됐었죠.
기억나십니까? 제가 갇혀 있던 기간이 20일이 넘습니다. 어떻게 살아남았을 것 같으십니까?

릴리안 웨즐리:(씁쓸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위층에서 죽은 놈이 있었는데, 그 피가 제 얼굴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도리가 있습니까? 받아 마셔야죠.
근데 그게 X-각성자였던 겁니다. 그 피를 마셨으니 제가 설계자 없이도 이렇게 강해진 겁니다. 의무장교님은 아십니다.

릴리안 웨즐리:선배님.
산다는 건 선택의 연속입니다.
저희는 정말이지 더는 이 전쟁을 이끌어나갈 수 없습니다.
오늘 일은… 옳았다고 할 수 없어도 옳은 겁니다.
몇 명인가는 모르겠지만, 적 부대 몇 개를 섬멸해서 더 큰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며 몇 마디 이야기를 더 하다 헤어졌다.
잠시 후 막사를 열고 지친 표정의 류재관이 들어왔다.
최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비로소 덤덤하던 그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말없이 최의 품에 파고든 그가 어깨에 머리를 기대어 온다.





형. ...형은 괜찮아?








그러니까 믿을게. 형을 믿으니까, 나도 나를 믿어볼게.

널 너무 의심하지 마. 여기에 너랑 맞먹을 수 있는 사람도 없을걸?











이미 안 괜찮은 김에, 사고나 쳐야겠다. ...설계 잘 깔아볼게.


그래, 형 저기 가서 자.




설계 다 깔았어.

아, 끝이 올까.
이 지난한 날들에.

다음날, 전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무렵 요한의 호출이 있었다.
스와콥문트 돌입 전 해방군 전용 워치 펌웨어를 업데이트하고 가라는 이야기였다.

상석엔 서글서글한 인상의 총사령관이 있었고,
요한이 우측 옆자리, 류재관이 좌측 옆자리.
그리고 류재관의 옆이 최였다.
…펌웨어 업데이트라고 하지 않았던가?
총사령관:그것도 해야지. 자네들 시계는 잠깐 풀어서 두게. 에를리히 대령, 부탁 좀 함세.
요한이 두 사람의 시계를 가져가 스크린 패널을 띄우고 이것저것 조작하는 사이,
총사령관이 손수 커피를 내려 앞에 내려 주었다.
총사령관:뻔한 격언이긴 하지만… 장교의 전쟁은 병사의 전쟁과 다르다는 이야기가 있지.
전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나, 어쩌면 올해 안으론 전쟁이 끝날 거야. 그렇지 않은가?
끝나면 자네들은 뭘 할 작정인가?


총사령관:그렇군. 당장의 전쟁도 중요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좀 더 멀리 보아야 하지 않겠나. 역시 전후처리까지 생각해야지.
사람들이 어느 정도 기대하는 바는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엔 상징이 필요해.
그때 뭔가 퍽 엎질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얘기하시려고 애들 부르라고 하셨습니까? 사령관님, 영웅의 삶을 왜 영웅 아닌 자가 강론합니까?
그만하고, 다 끝나면 두 사람은 풀어 주십시오. 상징이건 영웅이건 총사령관님이 직접 하시면 그만입니다.
그 과정에서 로맹 바투타처럼 되신다면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거고, 잘 하시면 여기 두 사람보다 더 대단한 위인이 되실 테고.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 마음대로니까. 안 그렇습니까?

총사령관:크흠... 그래, 내가 너무 성급했네. 사과하지. 자네들의 삶을 주무를 생각은 없어. 다만... 아까 말한 건 한번 생각해보시게. 시대의 등불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나.

저희가 잘 해 볼게요. 영웅처럼.
최의 말에 총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휘부 막사를 나간다.
요한은 한숨을 쉬며 홀로그램 패널을 연신 두드렸다.
보안 업데이트를 이어 나가는 모양이었다.
혁명군은 더는 공화국 지급 시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다카르에 독립적인 생산 라인을 구축해 두었다.
두 사람이 4년 전 발견했던 ‘SYSTEM SKYWAY’ 가 하늘길 시스템의 일부라는 것은 자명했다.
국민을 감시하고,
총본산 서버에 데이터를 쌓아 두는 시스템이 OS로 적용된 시계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요한을 주축으로 개발해 낸 새로운 OS를 적용한 시계가
모든 해방군에게 보급되고 있었다.
잠시 후에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마친 요한이 시계를 도로 내밀었다.

서버 컴퓨터에 질문을 입력하다 그랬었다.


당시에는 너희나 나나 아놀드 박사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결론이다.
(홀로그램 패널 하나를 크게 띄워 보여 준다.) 당시 모든 로봇들의 관리 전파를 한 송신기에서 받아 오고 있었는데, 그 송신기는 마치 각성자처럼 짝을 이루는 두 개가 한 쌍이야.
너희가 떠난 뒤 뒷처리하러 들어갔던 우리 내부자가 송신기를 빼돌렸고, 내가 분해해 봤거든.
모든 회로가 절반으로 잘려 있더군. 그리고 남은 하나의 짝 좌표값이…
스와콥문트로 되어 있었어.


일리는 있다.

대체 어디부터 뒤져야 할까?
도시 하나 넓이를 두 사람이 탐색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너희는 스와콥문트를 정복하러 가는 게 아니라, 스와콥문트의 진실을 파헤치러 가는 거니까 일단은 그 도시의 생체 정보를 추적해 봐야 해.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
‘스와콥문트로 갔다’ 고 하는 그 많은 ‘공로자’ 들이 정말 거기 살고 있는지, 사람을 추적해 보자는 거야.
그건 내가 업데이트해 둔 스마트워치 어플리케이션으로 해결할 수 있어.
그다음으로 대통령궁이나, 핵심적인 시설이 설치된 장소를 찾아야 해.

일단 너희 두 사람의 목표는 이것 두 개고, 통신하면서 그때그때 대응하자.
허를 찔러 빠르게 몰아쳐야 하니까, 사령부에선 적어도 일주일 내 작전 개시를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나흘 뒤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예, 지시 따르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요한은 오래도록 두 사람을 들여다보았다.
떠날 사람들을 이제라도 아로새기려는 것처럼.
두 사람이 공화국군을 절멸시킨 것만 같았던 전투로부터 며칠 뒤,
아군 병력은 새벽을 틈타 스와콥문트 방향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부대 행보관들이 꺼멓게 죽어가는 얼굴이 되어 진군을 준비했다.
하늘길 시스템의 지도는 사용할 수도 없을 뿐더러 고의로 조작된 부분이 많다.
일일히 정찰 드론을 먼저 보낸 다음 경로를 파악한 후에야 이동이 가능했기에
진군 속도는 예상보다 한참 늦어졌다.
공간이동 구현자들이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 가본 적도 없는 장소로는 이동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걸려 있었기에
더욱 선택할 수단이 없었다.
이동하는 아군 진로로부터 한참 앞선 곳, 매서운 함신 사이.
류재관과 최는 군용 오프로드 차량에 탑승해 있었다.
기묘하게도 모래 폭풍은 스와콥문트에 접근할수록 잦아들었다.
한치 앞도 짐작할 수 없는 사막에서 올바른 방위를 잡고 있다고 일러 주듯
기상 상황은 점점 더 좋아졌다.
차량의 자동 주행 기능은 지도 정밀성 문제로 믿을 수 없으니,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수동 운전을 시도한다.
기본 이동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며, 아래 순서를 3회 진행한다.
1. 정찰 드론을 날려 보내 주변을 관찰한다.
✷ 설계자, 항법 판정 ✷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3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드론이 스마트워치로 전송하는 영상을 분석하고,
스와콥문트까지 향하는 경로를 파악하는 것에 성공했다.




2. 선정한 방향을 향해 운전한다.
✷ 최, 운전 판정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7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차가 부드럽게 전진한다.
3. 운전자는 자동차 운전을 연속 2회 더 시행한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7 |
| 판정결과: | 실패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5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달리던 차 앞으로 크리쳐가 출몰한다.
에이가무차 Aigamuxa 인 것 같다.
에이가무차, 최, 류재관 순서
1 ROUND
에이가무차의 순서입니다.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3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3 |
1
공격 대상: 최
회피 혹은 반격할 수 있습니다.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4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1 |
반격에 성공합니다.
최의 순서입니다.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36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1 |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32/16/6 |
| 굴림: | 92 |
| 판정결과: | 실패 |
류재관의 순서입니다.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2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3 |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32/16/6 |
| 굴림: | 1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남은 HP: 9
2 ROUND
에이가무차의 순서입니다.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89 |
| 판정결과: | 실패 |
| 피해: | 3 |
최의 순서입니다.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6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2 |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32/16/6 |
| 굴림: | 43 |
| 판정결과: | 실패 |
류재관의 순서입니다.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6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4 |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32/16/6 |
| 굴림: | 1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회피에 성공합니다.
남은 HP: 7
3 ROUND
에이가무차의 순서입니다.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50/25/10 |
| 굴림: | 1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5 |
2
공격 대상: 류재관
반격 또는 회피할 수 있습니다.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76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6 |
류재관, HP 5 만큼 손실합니다.
최의 순서입니다.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4 |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32/16/6 |
| 굴림: | 77 |
| 판정결과: | 실패 |
류재관의 순서입니다.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7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6 |
에이가무차 Aigamuxa :
| 기준치: | 32/16/6 |
| 굴림: | 100 |
| 판정결과: | 대실패 |
남은 HP: 0
전투 중 최는 오래 전 품었던 기억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각성자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겪었던 모의 전투에서의 일이다.
‘저것은 어떤 길짐승도, 어떤 날짐승도 닮지 않았다.
……방사능 탓에 변이된 동식물이라기엔 조금 이상하지 않나?’
이후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고 지친 류재관과 최는 차량 내부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책에서 본 것과 외양이 달랐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고 해야 하나...







계급장 붙이고 얘기할까.











류재관이 사령부 쪽으로 현황 보고를 보낸다.
이후 휴식이 종료되면, 시간은 늦은 오후 내지는 이른 저녁으로 접어든다.
최가 시동을 걸고 몇백 미터쯤 이동했을 때였다.
갑작스레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에서 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전방 150미터 이내, 구조 요청 신호가 수신됩니다.」
발신자는 아놀드 밴에이슨,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놀드 박사, 아놀드 밴에이슨입니다.
내 시신을 발견한 당신이 만일 스와콥문트로 향하는 중인 각성자라면,
그 목적이 나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곁에 있는 아치문을 작동시켜 주십시오.’
구조 요청 신호? 이 사막 한가운데에서?
…아놀드 밴에이슨? 아놀드?
우선 스마트워치가 알리는 방향으로 다가가 보자.
✷ 전원, 관찰력 판정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7 |
| 판정결과: | 실패 |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4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근처로 접근했을 때, 류재관이 먼저 이상한 것을 발견한다.
모래에 파묻힌, …백골? 분명 사람의 백골 시신이다.
곁에는 기이한 아치문이 있었다.
차에서 내려 백골과 아치문을 확인할 수 있다.

가서 보자. 어차피 아치문도 작동하라 하니까.

백골 시신
낡은 방풍복이 반쯤 찢겨나갔고,
손에는 배낭과 낡은 신호 기기를 쥔 채 쓰러진 형상을 한 백골이다.
아무래도 이 신호 기기가 문제의 ‘구조 요청 신호’ 를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양열 발전으로 수명을 이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살점이 모두 풍화되어 뼈만 남은 사체인데도,
그러쥔 모양으로 깎여 나간 손가락뼈는 여전히 배낭과 신호 기기를 간절한 듯이 쥐고 있다.



음... 배낭을 봐야할 것 같아.

손에 쥐고 있던 배낭
몇 번이나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여 낡아 부스러질 것 같은 책이 한 권 나온다.
도무지 알아볼 수 없는 언어인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중간쯤 날카로운 필체로 이런 문장이 휘갈겨져 있다.
각성자의 피 몇 방울, 약간의 마력과 정신력.
‘나는 만지고 싶다. 느껴보고 싶다.’
일부 문장을 번역이라도 한 것일까?
그밖에는 말라비틀어진 건식 먹거리, 수분이 다 날아간 군용 수통 등
생존에 필요한 물품의 흔적이 보이는데,
이 사막을 홀몸으로 헤맸다기엔 준비가 마땅치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여기까지 혼자 걸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곡절로 스와콥문트를 목전에 둔 이곳에서 죽어간 것일까?


시신 옆에는 구조 요청 신호의 메시지대로 기묘한 문자가 새겨진 아치문이 있다.
아치문
사람 키 정도 되는 높이로, 오래된 고대 유적처럼 흙 벽돌을 쪄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이다.
벽돌마다 스마트워치조차 번역해내지 못하는 기이한 문자가 새겨져 있다.
아까 보았던 낡은 책에 쓰인 것과 같은 구조의 문자다.
아치 내부는 대단히 이상했다.
돌처럼 단단한 바람이나 만질 수 있는 구름처럼 환상적인 색채를 가진 채
반짝여 휘도는 물질이 맴돌고 있어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면 부드럽게 튕겨 나온다.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일단 해 보자. 어쩔 수 없잖아.


두 사람은 피 몇 방울을 아치문 너머로 뿌린다.
‘나는 만지고 싶다. 느껴보고 싶다.‘
묘한 문장을 읊자 잠시 후, 부드럽게 휘돌던 기체가 점차 형상을 갖추더니
스크린처럼 매끄럽게 펼쳐졌다.
이윽고 영화가 재생되듯 내부에서 여러 장면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S#1.
“For the first time in its life, the universe will be permanent and unchanging.
Entropy finally stops increasing because the cosmos cannot get any more disordered.
Nothing happens, and it keeps not happening, forever.”
“생애 처음으로 우주는 영원하고 불변하게 됩니다.
우주는 더 이상 무질서해질 수 없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마침내 증가하길 멈추게 됩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고, 일어나지도 않을 겁니다. 영원히.”
이연화:그 가정이 의미가 있습니까, 닥터? 우리는 ‘축퇴의 시대‘ 는커녕 제4천년기가 어떻게 흘러갈지조차 예측할 수 없어요.

이연화:당신의 가설을 처음부터 되짚어 봅시다. ‘재앙의 날‘ 당시 살아남은 아프리카의 일곱 도시가 모두 해안가와 인접하고 있다는 것이 수상하단 거였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해안선을 따라 도시 일곱 개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카사블랑카, 다카르, 몬로비아, 아비장, 두알라, 카빈다, 스와콥문트.
아놀드 박사, 지도를 짚는다.

그리고 카사블랑카부터 스와콥문트까지는 정확하게 1만 km 거리가 있지요.
이연화:좋습니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주장에는 나도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초의 설계자‘ 는 어떻습니까?
뭐가 됐든, ‘각성자‘ 들이 나타난 것은 ‘재앙의 날‘ 이후입니다.
재앙의 날 이전부터 어떤 사람이 자신이 ‘설계자‘ 가 될 것을 예측하고 앞으로의 일을 대비할 수는 없습니다.

S#2.
아놀드 박사, 방위사령부 지하 연구소에 틀어박힌 채다.
푸르고 괴괴하게 빛나는 홀로그램 패널을 멍하니 올려다본다.

하늘길 시스템은 100% 정확성으로 다음 선거 결과를 예측했어. 이게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한 영역이 맞나?
선거 결과 예측이란 것은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드는 일이야.
게다가 후보의 사생활 사건이 터진 것은 바로 어제야. 그 여파가 ‘계산‘ 되려면 언론 기사를 취합하고 사람들의 선택을 분석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나?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S#3.
아놀드 밴에이슨은 아프리카 대륙이 겪은 바 없던 규모의 허리케인이
해상 저편에서부터 나타나 몰려오는 것을,
그것이 굳건한 카사블랑카 장벽에 부딪혀 사라지는 장면을 목도한다.
불안한 표정으로 광장, 집, 거리, 가게, 학교에 모여 있던 시민들은 환호를 내지른다.
아놀드 벤에이슨의 절망감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하늘길 시스템이 재난을 예측했고,
방벽은 방비를 할 수 있었고,
시민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S#4.

이 데이터 안을 살펴보는 거야.
아버지, 분명 아버지라고 불렀어…….
엔트로피는 역전될 수 없겠으나, 회상은 사람의 편의에 따라 서술될 수 있다.
씬넘버는 다시 1로 돌아온다.
아놀드 밴에이슨은 주의 깊게 이연화를 들여다본다.

보십시오. 재작년 선거에서 그 후보의 사생활 사건이 터짐에 따라 승기는 다시 여당이 잡았습니다. 의석 중 대다수를 여당이 가져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민들 중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누구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오히려 국가를 향한 만족감만을 드러냈습니다.
그 허리케인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아무리 지구 기후가 엉망이 되었다고 하지만, 서아프리카 해안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이 대서양을 건너는 대신 역방향으로 몰아닥치는 경우를 저는 듣도보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카사블랑카 장벽은 굳건히 시민을 지켜내고, 시민들은 다시 자신을 지켜 준 나라에 환호하고…….
이연화:마치… 모든 게 안배되어 있는 듯이.

하늘길 시스템은… 표현할 말을 찾기가 힘들군요.
이연화:어떤 예언가가 일찍이 기술해 둔 지침서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하는군요.

이연화:당신이 주장하는 ‘최초의 설계자’, 로봇들의 ‘아버지’, 하늘길 시스템의 개발을 진두지휘했던 그 사람이 우리가 말하는 ‘예언가’ 라는 주장입니까?

이연화:그렇다면… 정말 그렇다면,
인류의 미래를 미리부터 결정짓고 이끄는 손이 있다면,
누군가 자신이 신이기를 자처하며 세상을 모형 정원처럼 들여다보고 있다면…….
“내가 할 일은 정해졌군요. 당신을 돕겠습니다.”
갑작스레 몸이 훅 끌어올려지는 감각이 든다.
두 사람은 지나치게 아치 안에 집중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기분이다.
헬기에 탔다가 마구 흔들려진 것처럼 멀미가 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래, 이연화는... 류재관의 어머니다.
그녀가 왜 여기서 등장한단 말인가?

어머니가, 아놀드 박사와....


형, 방위사령부 지하실에서 하늘길 시스템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었을 때, 하늘길 시스템이 되물었었잖아.
‘「최초의 설계자」에 대해 모르는 당신은 누굽니까?’ 라고.
그 직후에 우리 생체 정보를 스캔했고, 경비 시스템이 작동했어.


......하늘길 시스템에 대해서 형은 어떻게 생각해. 방금 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 같아?


그때,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가 동시에 강하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릴리안 웨즐리.

그런데 정찰병 말이. 저희뿐만 아니라 적군 진지에도 크리처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달 똑바로 못해!” 뒤에서 야단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한의 목소리가 전화를 바꾸었다.

적군은 대공습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미친듯이 크리처의 습격을 받고 있다.
지금이야! 스와콥문트까지 얼마나 남았나? 정신 팔린 사이에 얼른 진입하면 너희는 방해받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전방 8km 이내에 희고 거대한 장벽이 보인다.
5분이면 도착할 것 같다.
보고 후 전화가 끊어지고,
차량은 빠르게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시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스와콥문트를 동경하던 자들,
아무도 우리에게 세상을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적도편동풍을 넘어…….
그동안은 아무도 스와콥문트에 가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각성자가 아니라면 장벽 바깥은 감히 나갈 수 없고,
허가받은 사람만 이용할 수 있는 열차는 카빈다를 종착역으로 하고 있다.
철로는 스와콥문트 방향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그곳으로 향하는 열차를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성자라고 해서 달랐겠는가?
모든 각성자는 사관학교 시절부터 철저하게 그 행적이 관리된다.
하늘길 시스템은 모두를 철창 안에 처넣고 거친 숨을 내쉬며 우리가 정도만을 걷기를 강제했다.
의문이 많은 도시임에도 이 전쟁통이 되어서야 와볼 수 있었던 것이 당연하다.
희고 웅장한 벽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고대 도시를 감싼 성벽 같았다.
류재관이 정찰 드론을 두 대 양쪽으로 보내 성벽에 문이 있는지 찾아보게 시켰다.

너무 조용해.


잠시 대화를 나누던 중, 정찰 드론이 돌아왔다.
붕붕 돌던 정찰 드론이 영상을 출력해주었다.
동쪽으로 200미터 정도 돌아간 위치에 작은 문이 있었는데,
그 쪽문이 살짝 열렸다.
마치 드론을 감지한 것처럼.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도시라면 뭐 어디 감시탑이나 CCTV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영상을 돌려 보아도 그저 흰 벽뿐이다.



두 사람이 쪽문을 통과하자 짧은 바람이 휙 불었다.
문이 도로 닫혔다.
무언가에 의해 제어되고 있는 듯이.

고개를 든다.
첫인상은 색을 지운 도시 같다는 것이었다.
눈이 아프도록 새하얀 건물과 포장된 도로가 그들을 반겼다.
푸른 나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푸르름도 땅도 없었다.
이 세계 어딘가에 나무들과 무지갯빛 꽃들로 뒤덮인 260제곱킬로미터의 자연 흙 위에
대통령의 궁전이 세워져 있다는 생각이 언뜻 떠올랐다.
그 궁전은 철강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과 같은 존재였으나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 가상의 낙원 속에서,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카사블랑카에서조차 볼 수 있는 들꽃이나 나무 따위가 전혀 없었다.
상자곽처럼 낮은 건물들이 즐비했다.
도시보다는 작은 마을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높은 빌딩은 없었다.
언덕길을 따라 멀리 마을 중앙에 아름다운 반구형 유리돔이 있다는 것이 보이는 정도였다.
유리 온실이나 정원처럼 생긴 돔이었다.
류재관의 스마트워치는 반복해서
‘반경 5km 이내에 생체 반응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고 주장했다.
누군가는 이 도시가 진짜 낙원이기를 간절하게 바랐을 텐데.
야자수가 즐비하고,
종려나무 새순이 부드럽게 돋아나고,
우리는 살면서 본 적도 없는 그 백사장이란 것과 열대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있는…….


눈에 띄는 유리 돔을 목적지로 두고 얼마간 걷자,
두 사람의 시계는 점점 다른 알림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어폰 안으로 메시지 알림이 들렸다.
「반경 10km 수색을 완료했습니다.
마을 중앙, 현재 좌표에서 북서쪽으로 1.21km 위치에서 설계자의 에너지 파동이 관측됩니다.」
시계가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빨간 점이 3D 스캔을 완료해 띄운 맵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유리돔 근처로 추정된다.
추락한 헬기 잔해
좀 더 나아가자 길 한중간에 무엇인가 보였다.
추락한 헬기 잔해였다.
그것만이 이 징그러울 정도로 정신 나간 흰빛 도시에서
유일하게 낡아 가는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퇴락한 도시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꾸며둔 것만 같은 여기에서.
헬기 안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계기판이나 사용된 부품 양식으로 보아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1~2년 사이에 추락한 것으로 보였다.
사람이 앉았던 흔적이 뚜렷하고,
기능은 전부 망가져 있었다.
생각해 보면 한영 같은 능력이 있지 않고서야
헬기로 여기까지 정상적으로 들어와 내려앉기 어려웠을 것이다.



헬기가 추락했고,
다친 상태에서 맨몸으로 사막을 횡단하려다 쓰러져 사망하기라도 한 것일까?

형, 헬기 바깥을 살펴보고 있을래? 나는 안쪽을 볼게.

✷ 관찰력 판정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6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헬기의 겉을 자세히 살펴보면 꼬리 날개에서 총탄 자국을 발견할 수 있다.
헬기는 요격당한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각성자라면 모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설계의 흔적’ 이다.
설계에 실린 공격은 그것이 그리는 경로를 따라 불탄 궤적 같은 것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대통령궁을 이전한다고 했었지, 여기로.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입대를 독려하는 대통령 훈시 영상이, 모든 시민에게 퍼졌었다고 했어.
도시에... '공로자'들이 없으리란 거야 예측했지만, 저 유리돔 안에 대통령 혼자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아.
......로맹 바투타가 정말 저기에 있을 것 같아?

근데, 그럼 어디 있는 거야?

그런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길 멀리,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형상 하나가 ‘피어났다’.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이 떠오른 형체는 머리카락을 조용히 나부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
최를 따라 고개를 돌려 신기루를 본 류재관의 눈이 커진다.

하지만 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형상 뒤가 조금 비쳐 보였다.
이건 홀로그램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것이 바닥의 조명 장치에서 떠오른 형상이란 사실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류재관도 그것을 알아차린 듯 제자리에 멈춰선 채 신기루와 시선만 마주한다.
하지만 큰 충격을 받은 듯 쉬이 말을 잇지 못하는 듯하다.
얼이 나간 그 대신 최가 대화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갑자기......
이연화:하하, 우리 아가들이 많이 놀랐겠네. 그야 나는 신기루니까... 좀 더 쉽게 이해하게끔 기술적으로 설명하자면 인공지능과 동화된 뇌의 일부야.
죽어 가면서 마지막 힘을 짜내 나의 정신 일부를 이 도시를 관리하는 시스템 안에 침투시켰어. 그러니까 나는 인공지능이자, 이식체이자, 으음. 속히 말하면 살아 있는 '통 속의 뇌' 라고 해야 할까?

이연화:아, 너희는 내가 스와콥문트로 갔다고 알고 있었지... 안타깝게도 나는 이 도시에서 공로자들의 흔적을 찾지 못했단다.
저쪽에 박살난 헬기가 있지? 나와 아놀드 박사는 공화국 군대에게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건 채 그걸 같이 타고 여기로 쳐들어 왔단다.
'최초의 설계자' 라는, 우리가 쫓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데 모래 폭풍에 휩쓸렸지 뭐니? 모래 때문에 시야가 하나도 밝지 않은데, 웬 각성자의 설계가 꼬리 날개까지 잘라 버렸어.
우린 사이좋게 추락했단다.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일부' 를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지.
아놀드 박사는 어째서인지 장벽 바깥으로 나갔고, 그 뒤로 생체 신호가 꺼졋어. 내가 이렇게 이 도시의 시스템에 흡착되는 데 성공한 후 CCTV 기록을 살펴보니 너희가 발견한 그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더구나.
이연화:그러니... 너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류재관에게 시선을 주고는) 재관이 네가 오래도록 찾아 헤맸을 진짜 어머니는 아니라는 거야. 정말... 미안하구나. 나는 본체의 흔적을 따라 행동을 구사하고, 프로그래밍 된 코드대로 버릇을 구현하는 존재일 뿐이지. 그렇지만 어쨌든 목적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 이 도시의 시스템 안에 파고드는 것.

.......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기어이 제 얼굴에 주먹을 세게 내리 꽂았다. 부어오른 입안에 고인 피를 뱉지 않고 삼키며, 비로소 가라앉은 눈으로 아놀드 박사에게서 회수한 책을 내보였다.) ...이 책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연화:(책을 받아 뒤적여볼 수 없는 이연화는 곤란한 미소만을 지었다.) 표지만 보아서는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일단 읽을 수가 없는 언어인데. 하지만… 아놀드 박사는 고대 신화나 주문서 같은 것을 종종 연구하곤 했어. 내게 협조를 요청한 것도 그것 때문이란다. 내가 민속학 전공이잖니?
그 책에 대해선 모르지만, 아놀드가 왜 죽었는지는 짐작하고 있단다.

이연화:어떤 사건들이 마치 예비된 것처럼 일어나고, 하늘길 시스템은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처한다고 말했었지. 나는 그걸 두고 ‘마치 예언서라도 따르는 듯하다’ 라고 표현했고.
그걸 ‘예언’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앞날을 내다본 것일까, 앞날을 계획한 것일까?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이연화:맞아, 정답은 ‘계획했다’. 란다. 어째서 계획했는지 나는 모르지만, 아놀드 박사는 그걸 알아내려고 한 모양이야.
너희들이 본 이상한 아치를 이용해 ‘예언자’ 의 정체를 파악하려 계속 시도했어.
그러나 그런 기이한 유물 장치를 사용하는 데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란다. 아놀드 박사는 자신 안의 어떤 ‘대가’ 를 전부 소모한 끝에 죽어 버렸어.
얘들아, 이 도시에는 말이다, 하늘길 시스템 서버의 총본산이 있다.
저 유리 정원의 지하에. 나는 시스템 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 보았지. 정말 엄청난 정보량이라 분석할 엄두가 나지 않더구나.
하늘길 시스템은 시민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화하고, 나누었다 모아서… 가깝고 먼 두 가지 목표를 위해 쓰고 있지.
이연화:아무튼, 나는 로맹 바투타가 이곳으로 왔다는 정보를 수집한 기록을 시스템 내에서 발견했어. 그래서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는데… 로맹 바투타 대신 흥미로운 존재 하나를 만났지 뭐니.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었지. 대단한 인물이야……. 아마 너희를 오래도록 기다렸을 테고.
그녀는 좀 더 가까워진 유리 돔을 가리킨다.
이연화:이상한 점을 알아낸 게 하나 더 있단다. 저 유리 돔 주변을 살펴 보겠니?
아직 멀다. 돔 내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있다.
이 흰 도시에… 돔 주변에, 파르란 풀잎들이 돋아나고 있다.
이연화:무언가 있는 거야. (신중히 말한다.) 아놀드 박사가 했던 말이 기억나는가? 해안선을 따라 일곱 개 도시만이 살아난 것은 이상하다고.
나라가 시민들의 정보를 끌어당겨 그것을 독재에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희들이 소속된 군대에선 전부 다 알고 있는 일이지.
그리고 공화국 시민들은 그런 소문만으론 전부 다 설득되지 않았어.
하지만… 지구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누군가 그 환경을 억제하고 있다면, 그건 어떻겠니?
자, 자세한 건… 이제부터 너희들이 파헤쳐 봐야겠지. 저기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단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새 좀 더 가까워진 유리 돔을 가리켰다.)

...어머니의 시신이, 아직... 남아있습니까?
이연화:나를 추억하고 싶다면 바다에 가거라.
우리는 모두 스와콥문트를 동경하도록 배우고 자라났잖니.
너희가 잘 해낸다면… 거기서 나를 추억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게 될 거야!
이연화는, 마치 만질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처럼 팔을 벌렸다.
반투명한 홀로그램 형체가 꼭 닮은 자녀를 감싸 안았다.
느낄 수 없어도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없어도 만질 수 있고,
안을 수 없어도 안을 수 있었다.
이연화:잘 해낼 거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니까. 응, 그렇지?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
경보 부저처럼 애도와 언어가 무너져 떨어졌다.
지구가 이토록 훼손되었어도 바다는 빛깔이 푸르고,
그것은 산란의 법칙이 본래 그러한 까닭이다.

잘 닦아 놓은 푸른 눈동자는 오늘도 파장이 길었다.
슬픔의 가장 멀고 깊숙한 곳까지 단번에 파고든다.
그리움이란 어째서 이토록 화상 같은 감각일까?
손가락 한 마디가 더 돋아난 것 같고,
시간이 멈춰 있는데 머릿속에선 종이 울리고,
세계의 계절은 영원히 봄일 것만 같은데…….
그러나 이연화는 바람에 흩어지는 아라헤윰꽃처럼 흔들리다,
푸른 궤적을 남기며 위로 솟아 사라졌다.
류재관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바닥을 적시는 물기는 모른 척 해주어야 할까? 선택은 최의 몫이다.



아니면 들어가서 쉴래? 내가 다녀올게.

그래도, ......안아주면 안 돼?

...일단은 좀 달래줄까? 우리 동생!

...나는 어머니의 유지를 이어받아야겠어. 그리고...... 바다로 갈 거야. 형이랑 같이.






...이제 다 울었어. 가도 돼.


다가갈수록 유리 돔은 웅장한 위용을 드러냈다.
거대한 신전에서 무너진 주춧돌처럼 낡게 흰 기둥,
어떤 역사를 지닌 것이 분명한 폐허,
유리 정원을 둥글게 휘감아 도는 시냇물…….
새순과 풀, 작은 들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라헤윰 꽃도 두어 송이 보였다.
자생종인지 몹시 크기가 작았다.
카사블랑카의 인조 정원이 아니면 본 적도 없는 자연이었다.
인간의 손이 하나도 닿지 않은,
보석을 갈아 흩뿌린 것처럼 반짝이는,
그대로 숨쉬는,
책 속에서나 이야기하던 오랜 전설들.
근처로 나아갈수록 하늘마저 맑아졌다. 자연스레 넋을 놓게 된다.
은하수를 본 기억이 있는가?
그런 것이 있었다고 어디선가 흘려 들었을 뿐이다.
오르트 구름같은 별가루의 잔해가 검푸른 하늘 위에 펼쳐져 있었다.
주변을 더듬어 본다.
흙이 만져지고, 시냇물에선 냄새가 난다.
분수대와 인공 물길의 소독약 향이 아니라,
흙과 분변과 미생물이 섞인 냄새.
발치에는 종려나무 새순마저 보인다.
카사블랑카와는 다르다.
그곳의, 이미 다 자라난 채 옮겨 심긴 온실수들이 아니다.
왜 이 주변만 ‘재앙의 날’ 이전과도 같은 별천지일까?
무수한 별들이 발치를 걷는 인간들을 바라본다.
지독할 정도로 아름다워 잔인했다.
인간이 이런 광경을 빼앗겼다는 것이 얼마나 절실할 일인지,
가져 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법이다.
유리 온실에는 문이 없었다.
로코코 양식의 장식이 달린 흰 철제 아치를 통과하자 빼곡하게 피어난 푸른 장미가 그들을 맞이했다.
아래에 하얀 돌길이 깔려 있었다.
깊숙한 곳으로 이끄는 듯했다.
일부러 꾸며낸 온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식물은 두서 없이 자랐고, 종종 곤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동물까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그게 오히려 어색할 정도로 이곳은 천혜의 자연이었다.

그리고 긴 식탁이 보였다.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어떻게 만들어 올린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호화로운 저녁 식사가 나타났다.
식탁 상석에는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100살도 넘은 것 같은 노인이었으나 아직 눈빛이 형형하고 정정했다.
노인은 뜬금없이 말했다.
: 비극을 좋아하는가, 희극을 선호하는가?

: 하하. 나이 들어 혼자 산 지가 오래다 보니 내가 젊은이들을 데리고 장난을 좀 쳤군.
희극이든 비극이든 결과는 같지만, 어쨌든 자네들에겐 비극이고 내겐 희극인 이야기가 한 가지쯤은 있지.
그리고 노인은 상석을 끌어내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에게 앉으라는 턱짓을 한다.


두 사람이 앉는다면, 노인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나이프를 든다.
: 들게. 어린 송아지 등심은 아주 연하지.
스테이크를 자르는 손짓이 기묘했다.

예언자?
: 오,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그래. (노인은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고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나를 자네들이 찾는 ‘예언자’ 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군.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 용의는 조금 있지.
인류 최초의 설계자를 찾아왔는가? 그렇다면 번지수가 맞았어.


로맹 바투타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아는가? 빅 브라더도, 골드스타인도… 영원히 죽지 않지.
(노인이 껄껄 웃었다.) 자네들이 없는 것을 찾아 이곳까지 왔으니, 내게는 재미있는 일이지 않은가?
이 공화국 정부 전체가 말하자면 하나하나 로맹 바투타의 분신인데.
로맹 바투타는... 상징이야. 가짜 신이지.




정확히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전쟁은 계속됐고 앞날을 생각하는 목소리들은 묵살되었어.
그때 나는 아주 어렸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어떠하다고 판단할 만한 능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돌아보면 그랬어.
앞으로… 1만 2천 년이라네.
사람들이 마침내 서로 다투기를 멈추고, 서로에게 총칼을 겨누지 않으면서, 자연을 아끼고 훼손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배우게 되려면 1만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려.
나는 그것을 계산해 냈어. 이걸 두고 아놀드 박사가 ‘예언’ 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더군.


하늘길 시스템은 그저 내 능력을 본따 만든 것이지.
류재관, 자네는 설계자지. 이 설계 능력으로 전투만 할 수 있다고 여겼나?


인류가 완전해지기까지 앞으로 1만 2천 년이 소요되겠지만, 나는 그것을 3천 년으로 줄이고자 이곳에 있다는 게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로봇이 셔벗을 서빙해 주었다.) 물론 혼자서 계산하진 않았어. 내 아내가 많은 부분에 기여했지.
자, 생각해 보게. 그 수없이 긴 세월을 버티는 동안 인류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1만 2천년이 지나고 나서 ‘완전성’ 을 획득할 사람이 과연 남아있기는 하겠는가? 이런 지구에서?
그러니 시간을 줄여야 해. 이런 결론을 내렸을 때, 자네들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완전해지는 기간을 줄이겠는가?





테케네 드그레는 몹시 여유로운 태도다.

자네들은 또 다른 로맹 바투타가 될 수 있어. 민중을 결집시킬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이긴 하지만.
유사 이래 인류는 외부의 적이 있을 때 가장 확실하게 일치단결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어.
환경 같은 것보단 좀 더 가까운 적이 좋지.
전쟁의 상대 국가라든지, 스포츠에서의 경쟁 상대라든지.

나는 인류의 ‘적’ 을 안배해 두었다네. 앞으로 3천 년간.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적. 미리 정해 둔 시기가 오면 사람들이 적당히 어렵게 헤쳐나갈 수 있는 위기가 공화국에 닥칠 게야.
모두 손을 잡고 그것을 이겨내고, 감사함을 배우게 되지.
허리케인? 선거 결과? 재난, 살인, 사건, 반란, …해방군? 전쟁?
내가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미리 알지 못했을 것 같나?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을 되찾아 봤자 인간은 재앙의 날 이전과 같은 일을 반복할 게야.
적은 자원에 익숙해지게끔 먼저 교육하고 길들여야 해.
그러니 나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회복을 늦추고 있지.
자네 어머니 이연화에 대해 말해 볼까? (류재관을 바라본다.)

어머니를... 아십니까?

그자 하나를 빼앗음으로써 자네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해방군에 합류했고, 출중한 능력을 보여 전쟁을 제때 일으키도록 도왔지.
내가 원한 시기와 딱 맞았어. 감사를 전하지 않을 수가 없군.
내 아내가 기뻐했을 게야. 그녀는 줄곧 푸른 지구를 다시 보길 원했으니까.

그리고 노인은 한가롭게 커피를 마신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처럼 낯설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모든 비극이……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미리부터 설정되어 있었다고?
그때, 두 사람의 이어폰에서 동시에 같은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한이었다.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민간인이 죽게 생겼어! 우리 쪽 각성자의 숫자를 나누어 각 도시에 파견하려고 한다. 그쪽 상황은 어때!


류재관이 텅 빈 눈으로 이어폰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은 군용 암호로 테케네 드그레라는 신원미상의 인물과 마주했으며 대화 중이라는 내용이다.


이 시점에서 테케네 드그레가 말을 자르고 들어온다.

자네는 자네의 설계자가 떠날까 두렵지?
(턱을 괴었던 그가 아주 느리게, 경계심을 풀듯 최의 손으로 제 늙고 주름진 손을 가져간다.) 영원히 마음이 변치 않도록 묶어 줄까?
삼천 년의 미래를 안배한 내가 그것조차 해주지 못하겠는가?
내가 죽고 난 뒤 자네들이 내 역할을 대신해 주기만 한다면 나는 무엇이든 제공해줄 수 있다네.
사랑을 원하나? 그것을 나만큼 이해하는 자도 세상에 없을 거야.

진심은 무섭다.
상대가 거짓 없이 설득하려 든다는 게 보이니까.
테케네는 ‘아내’ 라고 발음할 때,
최가 ‘류재관’ 라는 이름에 담는 것과 정확히 같은 색깔의 감정을 실었다.

아내가 그것을 원했어. 푸른 지구, 더 나은 세상,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세계, 사람들의 행복, 그런 가치를 원했어. 그러니 내가 여기 있다네. 죽지 않고 살아서… 그녀를 기리면서.
자네는 어떤가? 나처럼 살고 싶은가? 먼저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겠지?


별들이 반짝이고, 연인과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그런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최, 이곳이 자네들의 에덴이야.
단 둘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고, 어떤 사람도 존재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로지 둘만이 여기 남아 낙원을 꾸려 살아가는 거야. 아담과 하와처럼.



뭔가, 좀......


무서워서 그러니까...



(테케네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고 절대로 변하지도 않는 멸망이 닥쳐왔을 때 자네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지? 자네들 능력으로 막는다고 한들 모두를 지킬 순 없어.
언제까지나 무적일 거라 생각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나의 말이 틀린가? 최, 자네는 떠나는 자네 파트너를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지?
그리고선 테케네 드그레가 벌떡 일어섰다.
노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운찬 몸짓이었다.

테케네가 일어서면서 몸이 조금 움직이자,
시야 때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광경이 드러났다.
뒤에 왜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했나 싶을 만큼─
어쩌면 어떤 오묘한 힘으로 보이지 않게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거대한 분수가 있었다.
그리고 분수대 가장 상단에 이상한 문자가 새겨진 돌덩이가 얹혀 있었다.
그것은 황금색 사슬로 감싸여 고정된 채 덜그럭거리는 중이었고,
뚜렷하게 금이 간 모양새였다.
금을 따라 빛나는 선이 그어져 있다.
애초에 조각난 것을 얼기설기 간신히 이어 놓은 듯했다.

어떻게든 내 의사를 받아들이고 나가서 사람들을 구하든, 아니면 자네들 뜻대로 나를 제압하든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아, 그렇지. 저 돌을 보고 있군. 저 돌은 우리 모두에게 아주 중요해. 자네들이 내 뜻을 거부하든 받아들이든 중요하지.
✷ 관찰력 판정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3 |
| 판정결과: | 실패 |
이 장소에 자라난 들풀이나 자연의 형태가 정확히 돌을 정가운데 두고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돌 주변과 분수 바닥에는 아몬드 꽃잎이 넘쳐흐르고,
주변을 벗어날수록 풀꽃이 드문드문해진다.

저 돌이... 지구 환경을 돌리는 열쇠인 것 같아.



그래, 다섯 번의 질답을 거쳐보는 건?
만약 질문을 통해 자네들이 정답을 맞힌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두 사람의 요구 한 가지를 들어주겠네.
하지만 실패한다면 두 사람이 나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겠어.



하죠, 그럼.



어떤 초자연 현상도 없었어. 그건 계산일세.
자, 다음 질문을 해보게.








지금은 내가 억지로 묶어 놓은 거야. 사슬을 벗어나고 싶어 움직이는 게 보이지 않나?

'재앙의 날' 로부터 7개의 도시를 지켜 준 돌들이 있다고. 20세기 중반부터 신화 생물과 관련한 유물들을 모아 여러 가지 음모를 저지해왔던 방첩 기관 OCSS 가... 보유하고 있었던 유물 덕이라고.
그 유물입니까?

OCSS가 '므나르의 별돌' 이 어떤 상황에서 어디까지 누구를 지켜주는지 실험 데이터를 모으고자 별돌을 일곱 조각으로 나누어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 일곱 도시에 설치해 두었었다지.
그 덕에 '재앙의 날' 로부터 이 일곱 도시가 살아남아 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이 된 걸세.
이제 자네들이 선택할 시간이군.
나를 어떻게 할 셈인가?
이곳에 목적했던 로맹 바투타는 없고 노인인 나만 남아 세상을 향한 실을 잣고 있는데.

내 제안에 따라 이곳에서 다음 미래를 준비할 텐가? 아니면 나를 공격이라도 할 텐가?
류재관, 자네는 어떤가? 내게 복수하고 싶지는 않나?


테케네, 사람은 언젠가 죽습니다. 영원불멸한 건 없죠. 그게 순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생명이라면 그 대전제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당신의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기를 위해 서로를 죽였고, 기술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자연을 오염시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는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인간을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당신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이 옳다 믿는 것을 고집대로 밀고 나가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안배한 축복을 받아 안전을 보장받은 존재들은 당신을 칭송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설정하고 예비해 두었다는 그 '위기' 탓에 죽어버린 사람들은 당신을 저주하겠죠.

이제부터 테케네 당신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이곳에서 초라하게 죽든 말든, 신경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 더 할 말이 있지 않은가? 내게 감복하든, 나를 죽이려 들든…….
(그게 테케네 드그레의 ‘계산‘ 안에 들어 있던 두 가지 가능성이었다. 그것이 깨진 것을 안 순간 노인의 안색이 파리해져, 순식간에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시간의 더께가 어깨에 쌓이는 듯 보였다. 위대한 영도자도, 예언가도 아닌 노인이 속삭였다.) ......내버려 두겠다고?
테케네 드그레는 숨을 삼킨다.
빠르게 무엇인가를 새로 계산하려는 것처럼 홀로그램 패널을 끌어 온다.
계산, 설계, 그가 평생 해온 어떤 것을.
그때 내부의 조명이 모조리 꺼졌다.
맑은 종소리 같은 것이 울린다.
어떤 여자의 음성이 스피커로 울렸다.
「사용자의 맥박 이상과 시동어를 감지했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됩니다.」
「프로토콜 ‘빛이 있으라’ 에 진입합니다.」
찬란한,
무수히 찬란한 별들과 서글프도록 빛나는 열대의 달이 조명처럼 돔 내부를 비추었다.
거대한 스크린이 장막처럼 펼쳐져 내려오고 있었다.
팟 소리와 함께 영상이 재생되었다.
옆에서 누군가 주르르 쓰러져 앉는 것이 느껴졌다. 류재관은 아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여성이었다.
멋쩍게 손을 흔든 그녀는 오래된 영상 속에서 말을 이었다.
“이 프로토콜을 숨겨 놓느라 아주 고생을 했어.
당신이 개발 중인 하늘길 시스템 안에서 이 흔적을 발견해선 안 되니까.
오로지 당신의 맥박, 당신의 말, 당신의 감정에만 반응하도록 꽁꽁 감춰 두었지.
당신은 어쩌면 평생 이 영상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본다는 가정 하에 말하고 있으니까, 내 소감을 이야기할게.
…굉장히 기뻐! 당신 계획이 망가졌다는 거잖아.”
야윈 얼굴을 하고도 어린 소녀처럼 빛나는 눈은 유리 구슬만 같았다.
"테케네, 나는 줄곧 말하고 싶었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계획대로 되는 일일까?
모집단이 어느 정도의 숫자를 유지하면 통계를 통해 계산해낼 수 있다는 당신의 장담은 올바른 일일까?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떤 개념일까?"
"나는 당신을 알아. 아마 내가 당신보다 먼저 떠나리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대신 내가 바랐던 싸움 없고 평화로운 세상을 나 대신 ‘구현’ 해 놓으려는 작정인 거지.
당신은 나의 구현자니까…….
그런다면 내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나의 의지는 세상에 남을 테니까.
그것 외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없으면 행복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신의 예상이지.
당신은 당신 자신까지도 계산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테케네, 나는 당신이 그저 자유 의지로써 살아갔으면 좋겠어.
인류의 먼 미래 같은 것은 놓아두고,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그걸 그저 지켜보면 좋겠어.
그러다 보면 아침이 밝고, 새소리가 지저귀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면서 맑은 물이 다시 흘러올 거야.
나는 살아서 다시 볼 수 없었던 지구의 새 아침을 당신은 맞이할 수 있을 거야.
살아가려는 의지만 있으면 어디든 에덴이 될 수 있어.
이 세상에 살아 있으니까 말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는 어디든 있는 법이잖아?"
문득 최의 손을 꽉 쥔 류재관이 옅게 웃는 것이 시야에 걸린다.
여자 또한 웃었다.
병색이 완연한 뺨에 홍조가 돌자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수십 년을 건넌 스크린 너머인데도.
“내 마지막 부탁이야. 별돌은 제자리에 돌려놓아 줘.
그리고… 이 영상을 다른 사람이 같이 보고 있다면.”
마치 화면 바깥을 보듯 여자는 시선을 살짝 돌려 정확하게 당신을 바라보았다.
"왼쪽 복도로 내려가면 지하 서버실과 연결돼요.
메인 컴퓨터에 내가 설정해 둔 코드를 입력하면 하늘길 시스템은 즉시 가동을 멈추고
공영방송사로 이 시스템이 시민들을 어떻게 감시해 왔는지 폭로하도록 되어 있죠.
필요하다면 사용하도록 하세요.
코드는, 이미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아주 크게 써있잖아요? 우리 이야기의 제목 말이야."
그런 후에 시선은 다시 테케네에게로 옮겨 갔다.
“안녕, 여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그러니 당신은 당신이 세워 둔 계산과 계획, 예상과 예측, 예언과 실현을 벗어나
똑바르지 않은 길로 가기를 바라.”
영상이 꺼졌다.



살아가려는 의지만 있다면 어디든 에덴이 될 수 있다는 말.


형 옆이라면 어디든 그랬지. 언제 어디서든... 형을 생각하면 생의 의지를 다지는 건 쉬웠거든.

아까 혹해서 미안...



떨어져 있는 동안 형 걱정만 했다고 했잖아.
......적어도 그때와 지금은 달라. 그때 느꼈잖아. 나는 형이야. 형이 나고. 형이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이상, 나도 형을 떠나지 않아.

죽었다, 죽었다 하다가 정말 죽으면 어떡해야 할지... 매일 밤 생각하는 게 제일 짜증 났어.

형.

밤에만 한 줄 알아?

그때도 나 좋아했어?

이제 내려가자.

우린 그 이후로 심장 박동까지 비슷해진 거.
대답은 들은 것 같으니, 내려가자.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 국적인들을 ‘국민’ 이 아니라 ‘시민’ 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이 이성적인 의사 결정 능력을 가진 현대인들에 의해
지극히 공화적인 절차를 밟아 주체적으로 건국된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 시각 카사블랑카에서는 노노이 라가힛의 형이 총을 쥔 채 장벽 너머의 크리쳐에게 격발하고 있었다.
스와콥문트 성벽 바로 앞까지 도달한 해방군 속에선 릴리안 웨즐리가
해방군의 깃발을 쥔 채 성가퀴 아래를 달리며 핏물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요한 에를리히가 전황을 수습하려 애를 쓰고,
다카르 시장은 죽어 가는 아이를 살리려 손수 환자를 업고 병원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전선은 머나먼 곳이다.
현대전은 총력전이 아니다.
카사블랑카 시민들은 이 전선의 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이야기는 각자의 자리에서,
호된 자유 의지 속에서,
활자 너머에서 실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되어 계속된다.
두 사람은 흰 벽돌로 짠 길을 밟아 내려가 지하로 향한다.
마치 몇해 전 방위사령부처럼 거대한 서버실 안에,
점점이 빛나는 항성처럼 메인 컴퓨터는 액정을 꺼트리지 않고 ‘최후의 질문’ 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입력할까?

어두운 액정에 은청색 타이포가 새겨졌다.
잠시간 기다리자 퍼센테이지가 올라가더니 100%에 달했다.
「정보 공개 프로세스로 돌입합니다. 지침 TK-G에 따릅니다.」
당장 이 지하에서 변화를 알아보기는 어렵다.
위로 올라가 볼까?


소란스러운 별들이 무수히 찬란한 지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테케네는 어디론가 사라진 것인지 보이지 않고,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분수대 위에 별돌이라는 것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황금빛 쇠사슬이 철컹거리며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분수대 아래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다가 이제 석판 뚜껑이 열려 드러난 것 같은 일곱 개의 빈틈이 보였다.
별돌 조각을 집어 빈틈에 맞물리도록 끼워 넣을 수 있다.





일곱 개를 전부 끼워 넣은 그 순간에,
눈이 멀 것처럼 환한 빛이 폭발하여 하늘로 솟아 올랐다.
아라헤윰꽃이 수억 송이 핀 것처럼,
황금색과 섞인 빛이 몰아닥쳤다 빠져 나가는 썰물 같이 도시를 뒤덮었다.
스와콥문트 성벽에서 잠시 멈췄다가 이내 도로 흘러 내려가 사막까지 닿았다.
빛의 물결이 닿는 곳마다 마른 모래에 습기가 젖어들고,
먼지와 구름이 가라앉아 날씨가 개었다.
성벽의 서쪽으로는 바다가 있다. 꽃망울 움트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을 안내하듯, 바다 방향으로 아라헤윰꽃이 무수히 피어 나가기 시작했다.

스와콥문트 성벽 안은 도시라기보다는 마을 규모 크기라, 서쪽 벽까지는 금방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흰 모래였다.
오염되고 낡아 언제라도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친 먼지가 아니라,
부드러운 백사장과 연푸른 바다가 맞닿아 은청색 파도와 물방울을 꽃처럼 틔우고 있었다.
등 뒤로는 동이 터 온다.
태양이 희붐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박명이 터 온다.
감미로운 볕이 피부를 적시고,
발목을 데우는 바닷물이 고요하고 우묵한 소음을 내면서 우리를 간지럽힌다.
맨발로 파도를 밟아도 괜찮을 것 같다.
이토록 깨끗한 자연을 본 적이 없다.
거칠고 매서웠던 폭풍이 지나간 후만 같다.
윤슬이 반짝이는 수면은 박명이 내릴 때 금가루를 뿌려 녹인 보석처럼 변했다.
오래도록 들여다보고 있자니 해의 궤적을 따라 점점 느긋한 에메랄드 빛으로 바뀌었다.
실크 같은 해변은 막 타오르다 꺼진 잉걸불처럼 무심하게 반짝이더니,
이윽고 태양을 온전히 수평선 위까지 잡아당겨 꺼냈다.
마치 우리를 발견되지 않은 땅으로 부르는 이정표 같았다…….
극지보다 싸늘한 절망 위를 날다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어리둥절해지게 된다.
이어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스마트워치도 마찬가지였다.
사방에서 이상한 소식들이 들리고 있었다.
다카르에 갑작스럽게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한 이야기,
크리처들이 햇살 맞은 먼지처럼 타올라 사라진 이야기,
혼란스럽게 소식을 모으고 있는 요한과 해방군,
카사블랑카에 돌연 보도되기 시작한 독재 정부에 관한 소식…….
그러나 두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는 해변에,
푸르고 흰 것만이 가득한 세상에 오로지 둘로써 서 있었다.
수 년 세월이었다.
살기 위해 두드린 세상의 성벽이 결국 한금 부서지고,
그 사이로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했다.
비단이나 성기게 짠 그물 사이로 반짝여 들어오는 별빛처럼 태양이 산란했다.
눈을 감은 채 바다 내음을 맡고 있던 류재관이 중얼거린다.


네가 훨씬 더 예뻐.







어차피 반지는 내가 만들게 될 것 같은데....
지금 당장도 만들 수 있긴 하지.
형, 방울 줘봐.


| 기준치: | 99/49/19 |
| 굴림: | 7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손바닥 위에서 황금 너울이 피어오른다.
공중에 떠오른 청동 방울이 그 속에서 녹아들었다가, 길게 펼쳐진다.
너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은 류재관이 녹아내린 청동을 섬세하게 문지르고 두드렸다.
너울이 걷히면, 그 손바닥 위에 놓인 건 두 개의 반지였다.


저 바다보다 아름답고 계획할 수 없는 네가 좋아. ...잃고 싶지도 않아.
묶을 수 없으니까 묶여줘.

막상 받으니까 할 말이 안 떠오르는데.
있잖아, 줄곧 형의 이름에 대해 생각했었어.
이름까지는 아니고, 그냥... 내가 형을 부르고 싶었던 호칭이었는데.


별로면 말고.
...진짜 별로야?

너무 좋아...

산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고,
우리 삶은 예언서에 적힌 한 줄짜리 운명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줄곧 살아서 말하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든 발버둥쳐 살아남아서,
가슴 안에 품은 것들을 말하고,
닫히지 않는 입술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발로 달려 나가길 원했다.
지금 비로소 살아남았으므로 우리는 어떤 별종이 사람의 의지를 감히 계산하려 했고,
수많은 비극의 철로를 깔아 인간의 역사를 주무르려 했다고 증언할 수 있다.
우리를 공격하고 비난하고 억눌렀던 어떤 것에 대해 고함칠 수 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감히 남이 간섭하거나 계산하거나,
주사위 놀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나만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테케네 드그레의 주장과 달리 모든 선택은 스스로 한 것이다.
예언자 따위는 예측할 수도, 계산할 수도, 설계할 수도 없다.
인간은 모형 정원에 들어간 이끼 따위가 아니다.
나 자신의 의지로 파괴될 수도 있다.
그게 사람다운 일이다.
사람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지을 순간이 왔다.
열대의 달은, 지구로 뛰어들고 싶은 듯이 은청빛 물결을 내려 보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둥근 것들은 둥근 만큼의 순리를 지니지
그래서 우리는 달로 가고만 싶었나봐 지구에서, 여기 다 벼려진 일곱 도시들을 버리고
사라진 자들이 이토록 많고 나의 우울은 도무지 겉잡을 수가 없어서
어느 날엔가는 불타는 아프리카의 해를 껴안고 죽고만 싶었어
도망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지
그러나 지금 여행은 망명이 아니야
사랑한다는 말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의견을 나는 반대해
하나뿐이고 싶은 욕망이, 내 사랑은 타인보다 더 특별하다고 주장하려는 마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더 머나먼 표현을 찾게 해
그러니 이 사랑이 유독 우리에게 아름다운 까닭은
들어본 적 없이 멋진 시어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야
속삭이는 이름이 너와 나의 것이라서야, 오로지 그것뿐이야,
사랑은 이름을 수식하는 것
너이기에 하나뿐이야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치 않아
모든 말들은 주어로 너의 이름을 쓰기에 화사해진다
네가 특별하다 말하고 싶어, 그걸로 다였어
스와콥문트, 가본 적도 없는데 잊지 못하는 곳,
기나긴 백사장 위로 LP판 같은 파도가 도는 도시
적도편동풍을 타고 영원으로 가자
글자들의 음각에 포말이 들이칠 것을 바라고 쓰자 사, 랑, 해
거품이 묻어 잠기면 우묵한 틈새로 물이 고여
무엇도 지워내지 못한 말들이 드러날 테야
아, 사랑에 대해 떠올릴 수 있다니,
별처럼 노란 태양을 등지고 내가 아직 세상이 눈부시다고 느낄 수 있다니
1만 킬로미터를 걸어 카사블랑카로부터 스와콥문트까지 도망치지도 망명하지도 않았다니
해陽와 해海를 돌아
셀 수 없는 곶과 만을 넘어서
여기 도달한 순간 찬란하게 살아 있었어, 마주 쥔 손으로 해류를 가늠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이 모든 일들은 / 지나온 사막은
훼손이 아니었으므로 무엇도 우리를 부술 수 없었어 나는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았어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소리치지 않을 까닭을 모르겠어
들어, 살아서 이야기할 거야, 어떤 구전은 기록보다 강력하니까
오늘 우리는 길었던 고통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게 될 거야
나는
살아서
말하리라
CAST
PC 최
KPC 류재관
극본 헤르츠
연출 수호자, 플레이어
and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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