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과 발가락 사이 거품처럼 부드럽게 감기는 파도를 느끼며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그리고 넘쳐 흐르는 햇빛을 마시듯 눈을 감은 채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빛줄기가 눈가 위에 고이자 속눈썹이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무슨 화제인지 깨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말들을 나누다,
악곡이 끝나면 바닷가로 이어진 무도회장을 떠나 손을 잡고 달렸다.
다채로운 색상으로 구성된 해변을 밟으면서 발가락 사이를 간지르는 모래의 온도를 즐겼다.
깍지를 끼면 본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서로 잘 맞물렸다.
참았던 말을 터뜨리려 입술을 벌리는 순간에 꿈에서 깨었다.
살아 계시면... 손이라도 들어 보시겠습니까.
지는 해를 등에 건 탓에 온통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면서.
저무는 무역풍과 탄산 같은 폭발음이 세상을 수놓던 현장에서.
문장을 나누어 쓸 수밖에 없이 맹렬한 감정 속에서.
규칙 없는 난수처럼 일렁이던 에너지가 격자 모양을 그리다 하나의 직선으로 모아졌다.
곧이어 에너지 파형이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그의 등 뒤로 메다 꽂혔다.
곧바른 쇠뇌같이 사방 몇십 미터 안의 모든 것을 폭발시켰다.
이강헌:
정신
기준치: |
70/35/14 |
굴림: |
6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최의 세 번째 실전 전투였다.
건물 잔해와 부서진 폐허 속에 처박혀 있는 자신이 눈에 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군이 열세에 밀려 전멸 위기에 처했고,
그것을 막으려다 크리쳐의 공격에 휘말려 날아갔다.
무슨 수를 쓴 건지 이번엔 엉망이던 주변 풍경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당신을 일으켜 로봇의 들것에 실어 준다.
얼마 전 전투에서 최는 며칠쯤 입원해 안정하고 내상을 점검해야 한다는 소견을 받았다.
곁에 머무르는 의료 로봇이 멋대로 방송을 틀어 둔 것인지,
홀로그램 패널에서 시사 프로그램이 재생되고 있었다.
언론은 각성자사관학교 졸업식 이후로부터 지난 몇 달간
지겨울 만큼 류재관의 소식을 대서특필해대고 있었다.
‘괴뢰 정부(정부가 망명 정부를 지칭하는 어휘는 공식적으로 늘 ‘괴뢰’ 였다)
에 납치되었으나 모진 고문을 받고도 탈출해 돌아온’,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4년의 시간을 버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지난 4년간 류재관의 행보는 이랬다.
각성자사관학교에서 발생한 극렬분자 폭동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각종 테러 혐의에 강제로 차출되었지만 의지를 잃지 않아 반항한 끝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런데도 결국에는 살아 돌아와 카사블랑카 장벽의 문을 두드렸다.
정상체중보다 10kg 이상 말라 있었던 모습은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 어머니는 공로를 인정받은 스와콥문트 거주자, 본인은 각성자.
그가 ‘붙잡혀 있던’ 4년 동안 카사블랑카 장벽 바깥,
그리고 카사블랑카를 제외한 다른 도시에서는 종종 테러나 시위가 벌어졌다.
하위 정부 인사 몇몇이 실종되거나 도시 청사에 폭발물 따위가 설치되는 사건이 갈수록 잦아졌다.
규모가 점점 커지니 정부도 외부의 저항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괴뢰 정부’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것이 3년 전.
그런 마당에 난데없이 애국 프로파간다를 하기 딱 좋은 사람이 굴러들어왔으니
바르게 앉은 류재관은 그가 겪었던 망명 정부의 끔찍한 실상,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도구로 이용하는 테러리스트들의 목적을 비판하며 증언을 계속해 나갔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류재관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정부친화적 커뮤니티와 기사에선 그를 구국지사로 추앙하는 댓글들이 연이어 달렸다.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까? 최의 사고를 들어 보자.
이강헌:(본인 스스로 들어간 것이 어떻게 잡혀 들어간 것이고, 지극한 효심이 어떻게 애국인가? 허울만 있는 유토피아라는 곳에 직접 홍보대사가 되는 게 어떻게 잘한 짓인가? 그건 학우 하나를 잡아간 일인데. 아직 4년 전 한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뭐 하나 곱게 보이는 것이 없다. 삐뚤어진 표정이 제자리 잡을 생각도 없을 때 프로그램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잠긴 사이 화면은 훈장 수여식으로 전환되었다.
저번 전투에서 대활약한 공로로 류재관은 또 하나의 약장을 군복에 달게 되었다.
의례를 따라 한쪽 무릎을 굽혀 훈장을 받은 그는
조용히 일어서 화면 속의 또다른 화면을 응시했다.
내달이면 참모총장 비서실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이 줄을 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사관학교를 수료, 졸업한 선후배들 중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대다수가 이 전향을 조롱했다.
그들에게 류재관은 개인의 영달을 좇아 정의를 저버린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 나타나 지금까지 연락 한 번이 없는지,
변절자들의 시대가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그 발자취에는 사라진 사람들의 눈물이 고였다.
어떤 경우에는 그리움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이강헌:
지능
기준치: |
70/35/14 |
굴림: |
32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평소 잘 쓰지 않던 기능이, 그리운 얼굴과 함께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스마트워치 옆면의 S버튼을 연달아 세 번 누르면,
위급상황 시 연락처에 미리 등록해 둔 비상번호 쪽으로 연락이 가는 시스템이 있다고…
신호 위치는 군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이다.
4년 전 그 위치를 둘러싸고 새벽 내내 발을 굴렀던 소란이 새삼스레 떠오르는 듯하다.
이한영:이강헌? 나야. 모시러 왔다. 몸 좀 괜찮냐?
지금은 방위사령부 정보통신단에서 근무 중인 이한영이었다.
최와는 여러 가지로 뜻이 맞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온 사이다.
퇴원을 한다고 하니 안부가 걱정되어 살피러 온 모양이었다.
이 위급 신호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한다면 한영이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이강헌:몸은 이제 멀쩡해. 그것보다 다른 문제가 있는데...
...나한테 위급 신호가 왔거든. 근데 위치가 방위사령부야. 너 일하는 곳이기도 한데, 너도 지금 여기 있는 것도 모자라서 나한테 위급 신호 보낼 애는 한 명밖에 없잖아. 거기 무슨 일 없어?
이한영:류재관 말하는 거지? 음...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걔가 비밀리에 널 부르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정보통신단이라서 아는데, 만약 네가 걱정하는... 유리 선배 같은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거면 오히려 위급 신호는 못 보내. 방위사령부 지하에 전파차단기가 있거든.
이강헌:그럼 그냥 날 부르려고 위급 신호를 보냈다고? 일단 큰일은 아니라는 거지? 그럼 됐어.
...일단 가 봐야겠는데.
이한영:아, 안 그래도 말해주고 싶었는데 말이다... 방위사령부 내에서 류재관 걔 지위가 조금 이상하더라?
가만 보면 어딜 가든 그 계급 이상의 의전을 받는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감시 당하는 느낌이었거든.
나는 동기인데도 인사도 못하게 제지 받고, 말도 못 섞게 해.
사무실도... 걔 혼자만 다른 층 쓸걸?
으음,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몰래 불러내야 한다면 나라도 위급 신호부터 생각해냈겠다.
이강헌:당연히 걔는, ...음. 조금 인위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긴 해. 네 말대로 감시가 심해서 따로 못 부른 걸 수도 있겠다.
이한영:너도 알다시피 방위사령부는 아무나 못 들어와.
하지만 내가 누구냐! 마침 우리 형이 오늘 저녁에 나 보러 온다고 방문자 등록을 해뒀는데, 조카가 아파서 못 온다더라.
그 출입증으로 들어오면 기록도 안 남아서 추적당할 일도 없을 거야. 저녁에 같이 들어가 보자.
대신... 머리 색만 좀 어떻게 해봐. 까맣게. 알지?
이강헌:머리색? 아, 이거 너무 갈색인가? 저녁 전까지 준비 좀 할게. ...고마워.
이한영:그래. 이건 빚으로 달아둘 테니까 나중에 꼭 갚아라~
미리 약속해 둔 대로 한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CCTV며 보초병들이 근처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이한영:오... 머리색이 바뀌니까 좀 다른 사람 같네.
이강헌:그렇지? 나도 거울 보고 자기소개 좀 했어.
이한영:크크, 어차피 보초병들도 동양인 얼굴은 잘 구분 못 하니까 머리색만 비슷하면 괜찮을 거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병장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는데,
의외로 출입 게이트는 별 문제 없이 통과했다.
다만 게이트 앞에 있는 보초병들이 두 사람을 훑어본다.
이한영:정보통신단 이한영 소위. 여긴 가족. 오늘 방문하겠다고 등록해 놨는데.
RP 또는 대인 기능 판정 등을 통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이강헌:
말재주
기준치: |
65/32/13 |
굴림: |
4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당신과 이한영의 친근한 모습에 보초병도 별말 없이 비켜선다.
7층짜리 건물에 2, 3성 장군들이 즐비하니,
방위사령부 위관급 장교 따위가 단독 사무실을 쓸 일은 없다고 봐야 했으나...
대위 계급인 류재관은 숙직실까지 딸린 사무실을 홀로 쓰고 있다고 했다.
이한영:뭐, 하긴 모든 군인이 각성자 출신인 건 아니고……. 각성자 군인의 경우 그 대우가 일반 군인과는 다르기도 하니까.
진짜 이상한 건 층이지, 층.
5층부터 7층까지는 거의 플라네타리움이거든? 근데 거기 류재관 혼자 껴 있으니까.
5층부터는 별 달린 장성들이 주로 사용한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한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인지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출입 카드를 몇 번이나 다시 찍어 통과해야 했다.
본래대로라면 이 출입 카드에는 한영의 사무실인 3층에 방문한 기록만 남아 있어야 했으니까.
마지막 게이트를 통과하자 복도 끝에 류재관의 사무실이 있었다.
한영은 최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물러나 들어가보라는 턱짓을 했다.
이강헌:(문 앞에 서자 기운이 늘어진다. 멀리 있는 것이 익숙해진, 언약에서 태어난 이 안에 상대가 있다는 무의식은 왜인지 달갑게 와닿지 않는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문을 두드리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류재관, 재관아.
한참을 기다렸지만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문이 열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안쪽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열린 문이 숙직실이고, 그 안에 또 욕실이 있는 모양이었다.
열려 있는 문 너머로 벗어 둔 옷가지가 보인다.
단순히 최를 몰래 불러내기 위해 신호를 보낸 것일까?
무심코 방을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상자가 하나 보인다.
이강헌:(이 상황이 묘하게 안심이 된다고 해야 할지, 한결 풀린 기분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를 확인한다.)
최 형에게. 잘 지내십니까? 저 류재관입니다. 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할 모르겠…
최 형에게. 류재관입니다. 벌써 1년이나 지났습니다. 여전히 편지는 쌓여가고…
최 형에게. 건강히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최 형에게. 류재관입니다. 실은, 점점 버티기 힘들어집니다. 형 얼굴이…
최 형에게. 형, 만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중 몇 장은 설계도였는데, 그 또한 류재관이 그린 최가 쓸 무기의 도면이다.
최가 물건을 살피고 있을 무렵, 문이 열리며 샤워를 마치고 나온 류재관이 나온다.
하의만 걸친 채 수건으로 머리를 털던 그가 당신을 발견하고 표정이 굳는다.
흉터로 너덜거리는 상체가 휙 돌아가더니, 금방 옷을 갖추어입는다.
다시 고개를 돌린 류재관이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하더니 입을 연다.
잘, ...지내셨습니까?
딱히 네가 물어볼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난 잘 지냈어.
류재관: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오늘 퇴원하신 것 같던데,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이강헌:늘 말한 건데, 괜찮으니까... 내 걱정하지 마.
류재관:...저는 4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형의 안위만 걱정 했는데, 그래선 안 됐었습니까?
류재관:(그 말에 잠시 눈을 크게 뜨다가, 눈가를 접어 희미하게 웃는다.) ...예, 말 듣겠습니다.
이강헌:(미소를 보자 갑작스레 욱씬거리는 가슴께에 아랫입술을 짓씹는다.) ...야, 웃으라고 한 말 아니야.
그보다 왜 불렀어?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그것도 위급 신호로...
형이 보고 싶었습니다.
감시 당하는 중이니, ...당신을 부를 수 있는 수단이 이것 뿐이었습니다.
류재관:...더러운 오물보다 못한 말들이 정말로 제 머릿속에서 나왔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이강헌:난 네가 다녀오더니 미쳤나 싶어서. 괜히 보냈나 싶기도 하고...
류재관:제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이강헌:난... 너면 다 궁금한데. 뭐 했어?
류재관:저는 보츠와나 망명 정부 산하, 스와콥문트 근처에 설립된 나미브 반군기지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장교로 활동하며 후배들을 양성하고 가르치는 게 제 주 업무였습니다.
이강헌:거기서도 어울리는 거 했네. 어머니 소식은?
제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는. 형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크지만... 임무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재 저는 정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사실 저는 망명 정부의 지시를 따르는 이중 스파이입니다.
복귀 시에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긴 했지만, 잘 대비해둔 덕에 받아 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하여, 카사블랑카에서 망명 정부를 위한 몇 가지 임무를 같이 수행한 후 다시 이 도시를 떠날 계획입니다.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이것을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류재관:최 형. ...혹시 저와 동행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저는, 이제... 가족이 없습니다. 하지만 형은 그렇지 않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셔도 됩니다.
이강헌:난...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너야. 네 목소리나 방울 소리도 계속 듣고 싶어.
널 앞에 두고 고민할 여유가 어딨어? ...가도 괜찮아?
류재관:그곳에서 형의 이야기를 아주 많이 했습니다. ...다들 궁금해 합니다.
같이 가시면, 환영 받으실 겁니다.
여전히 감시 받고 있긴 해도, 요 근래 외출 정도는 가능해졌습니다. 내일은 요한 선배에게 잠시 다녀오려고 하는데, 같이 가서 그간의 상황을 들어야 합니다. 저도... 그 선배와 4년간 한두 차례 연락한 게 다라서요.
이강헌:...잠깐만. 여기랑 연락할 방법이 있었어? 나한테는 쌓아만 두고 한 번을 안 했잖아.
류재관:아, 그건...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받은 겁니다. 그분 능력과 관계되어 있을 테지만... 양방향 소통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형, ...쌓아만 뒀다는 건 어떻게 아십니까? ......설마 보신 겁니까?
이강헌:아, ...보면 안 되는 거였어? 대놓고 있던데.
그거 형 보라고 거기 둔 거 아닙니다!
이강헌:그럼 내 건데 누구 보라고 거기 둬? 형한테 언성 높이지 마!
류재관:으윽. ......나갈 때 가지고나 가십시오. 말씀대로 당신 주려고 모아둔 거였으니.
이강헌:결국 나 보여주려고 한 거 맞으면서 왜 투정이야?
류재관:가실 때 드리려 했단 말입니다. 거기 얼마나 민망스런 말들이 많이 쓰여있는데... 하.
이강헌:자세히 안 읽고 그냥 훑어보기만 했어. ...아마도.
더 뭐라고 하면 여기서 낭독한다?
류재관:...됐습니다. 더 머무르면 슬슬 위험해지니 이제 돌아가십시오.
보고... 싶을 겁니다?
(성큼 눈앞으로 걸어가 비범하게 선 것에 비해, 스치듯 한순간 힘껏 끌어안고 그대로 떨어진다.) 눈치가 그 모양인데 애들은 어떻게 가르친대?
류재관:......! (놀란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있다가, 떨어지려는 몸을 붙잡아 다시 끌어안는다. 보다 가까워진 몸에 익숙한 재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몇 년만에 느낀 익숙한 온기에 눈이 질끈 감겼다.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채 작게 웅얼거렸다.) ...그리웠습니다.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형.
이강헌:그런데 인사를 그렇게만 할 생각을 하는 게 더 신기해, 알아? (익숙한 구도에 저도 모르게 올라간 손이 과격하게 머리칼을 헤집는다. 이렇게 있는 게 몇 년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 순간 지난 날들을 멍하니 헤아렸다. 고개를 가까이 대자 챙이 받쳐진 모자가 들리기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도 보고 싶었어.
류재관:...아, (고개를 번쩍 들더니 가까이서 시선을 마주한다. 푸른 눈이 꿰뚫을 듯이 상대의 머리칼을 응시한다.) 형 머리 색은 왜 까맣게 물들인 겁니까?
이강헌:응? 아. (시선을 따라가 어색한 색이 물들여진 머리칼을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눈매를 휘며 웃는다.) 여기 들어오려고 내 친구 친척인 척한 거긴 한데, ...이게 좀 더 너랑 닮지 않았어?
류재관:(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손등 위로 제 손을 덮어본다. 옅게 화답했다.) ...저 때문이긴 했군요. 이러니 정말 형제 같기도 하고... 어떤 모습이든 좋습니다.
아무튼, 이제 정말 가보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여하튼, 인사도 제대로 했으니까 가 볼게. ...잘 자.
지난 4년 간, 요한과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졸업 후 자취를 감춘 그의 신원에 대해 뜻을 같이 하는 선후배 사이에선 소문이 많았다.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는 추측은 그가 도시 바깥의 망명 정부로 귀순했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사라진 그가 학장실에 분변 테러를 하고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얼빠진 동기도 있었다.
그러나 류재관은 요한이 ‘숨어 있는’ 곳을 안다고 말했다.
결벽적으로 관리되는 도시인 카사블랑카에는 ‘뒷골목’ 따위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대체 어디에 몸을 의탁하고 있단 말인가?
각성자사관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는 그곳.
가톨릭이 아직도 힘을 쓸 수 있는 데에는 여러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다.
재해 이후 여러 사이비 종교가 날뛰며 가톨릭의 자리를 대체하려 들었지만,
요행히도 바티칸이 살아남은 덕분에 촘촘한 교구 간 연락망을 복구할 수 있었다.
성당을 중심으로 가지를 뻗어 나간 공동체들이 세력을 형성하면서,
유럽 연합은 아예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
애당초 ‘재앙의 날’ 이후 사회 재건에 중추적 역할을 해온 것이 가톨릭이었다.
건국 초반만 해도 성당을 통해 제공되는 교육, 의료, 구호 활동 등은
공화국 정부조차 대체하기 어려운 중요한 자원이었다.
공화국 건설 자체가 가톨릭에 기댄 면이 있으니
정부라고 해도 함부로 무시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정부도 함부로 참소할 수 없는 성당 문을 류재관은 거침없이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온 신부는 두 사람의 군복을 보고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류재관이 무어라 언질하자 수긍하고는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성심성당에서는 류재관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신부는 1층 식당으로 두 사람을 안내하고 물러났다.
냉장고가 줄지어 선 평범한 식자재 창고처럼 보였다.
이강헌: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바닥 타일 사이에서 줄눈이 살짝 뜯겨 나간 자국을 발견한다.
발끝으로 바닥을 퉁퉁 두드려 본 류재관은 쪼그려앉아 속삭였다.
류재관: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냥 거기 계시옵소서.
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기도문이었다.
아니, 저런 이상한 문장이 기도문이기는 한가?
아무래도 이 타일 바닥 아래에 뭔가 숨겨진 것 같은데…….
이강헌:
손놀림
기준치: |
60/30/12 |
굴림: |
93 |
판정결과: |
실패 |
아야! 손톱으로 타일을 들어올리다 손끝을 찧었다.
이강헌:아니, 나 안 다쳤어. ...그냥 실수야.
이강헌:
손놀림
기준치: |
60/30/12 |
굴림: |
4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타일 틈새를 들어올리자 사람 하나가 간신히 통과할 것 같이 좁은,
어두워 잘 보이진 않지만, 계단 끝에 문이 있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다시 짧게 세 번.
처음 든 인상은, 천장에서 책더미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미친 사회학자의 방을 그리라고 하면,
아무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 것 같으니 방에 연구 일지와 책을 가득 채워 놓을 것이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제멋대로 쌓여 있는 도서, 문서, 기기, 회로,
무얼 건드려도 쉽게 쓰러질 것 같은 기물들 사이로
간신히 사람 하나가 걸어갈 만한 오솔길(?)이 나 있었다.
...선배, 저 왔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고 흔들리는 요한의 뒤쪽으론 웬 콩나물이 수경재배되고 있었다.
류재관:여기 들어올 때, 감시가 좀 덜해지면 선배를 찾아가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부가 수상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저는... 아니, 저와 형은 그 부분을 수색한 후 나미브 반군기지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요한 에를리히:아… 그거. 나도 정확하게 캐낸 건 아니야. 그래서 바깥에서 활동 가능한 요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정부가 비도덕적인 인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어. 네가 참모총장 비서실로 이동하게 된 건 의도적인 거지?
류재관:예, 선배가 그 실험에 대한 정보를 참모총장이 쥐고 있다 보고 하셨잖습니까.
요한 에를리히:그래, 참모총장이 자기 공관 서재에 그 ‘프로젝트’ 혹은 ‘실험’에 대한 정보를 보관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추측하기론 그 정보가 알려지면 처지가 불리해지는 정적이 있는 모양이야. 라이벌 관계에 있는 인간을 언젠가 제거하기 위해 정보를 일부러 쥐고 있는 것 같더군. 보안이 아주 철저해. 공관에 침입할 방법이 필요해.
류재관:다음 주 열리는 정재계 자선 파티에 참모총장이 참석하고, 저와 강헌 형이 그 호위 역으로 가게 될 예정입니다.
그때 제가 파티장에서 참모총장을 붙잡고 시간을 끌고 있으면, 강헌 형이 공관에 침입하시는 게 어떨까 싶은데...
형, 괜찮으십니까?
이강헌:너랑 같이 돌아가려면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 거 아니야? 비교적 쉬운 방법이 생기면 적기라는데, 다음 주에 맞춰서 열리는 게 있으면 그게 적기지.
난 괜찮아.
요한 에를리히:좋다. (서랍에서 인이어와 렌즈 두 세트를 꺼내 내밀었다.) 파티 땐 나도 현장 보고 있을 거야. 렌즈 끼면 너희 시야가 나한테도 영상 전달될 거고, 인이어는 소통용이다.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이강헌:...여기 있는 이상 안전하실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다치지도 마시고요.
요한 에를리히:원래 모니터 앞에 앉은 놈들 명줄이 제일 길어. 너희도 다치지 말고. 그런데 이것들 몇 년 만에 보니까 기스가 몇 개냐? 아주 군인 다 되셨구만.
이강헌:재관아, 네 얘기하시잖아. 빨리 사과 안 해?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류재관은 두 사람이 페어로서 공식 활동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보고했다.
최는 몇 가지 조사와 사상검증성 면접 같은 인터뷰를 했지만,
정식 페어라는 유용한 전력을 깨트릴 수 없으니 효용성 측면에서 어떻게 넘어가는 것 같았다.
애초에 류재관이 넘어올 때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기도 하다고 했다.
정재계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는 자선 파티였다.
드레스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테이블 사이를 미끄러지듯 누비고,
두 사람은 멋지게 차려 입었으나 사실 참모총장 호위를 담당한 상태였다.
류재관이 자신을 증명하고 싶다며 자원했다는 모양이었다.
파트너로서 자선 파티에 당당히 들어가면 된다.
머리를 올린 류재관이 정장이 어색한 듯 몇 번이나 쓸면서 최를 곁눈질 한다.
적응이 안 됩니다.
이강헌:잘 어울리는데? 비슷한 건 계속 입고 지냈잖아.
류재관:하지만, 이런 파티용 옷 같은 건...
그보다... 멋있으십니다.
류재관:혹시, 누가... 춤 신청하면 거절하셔야 합니다.
류재관:당신 질투할 처지는 됩니다. 페어인데 못 합니까?
이강헌:이럴 땐 페어 말고 형이라고 하셔야지.
이강헌:...으하하! 안 출게, 안 춰. 알겠지?
그니까 눈 무섭게 뜨고 지켜보지 마...
참모총장은 파티장 안쪽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보고 손을 번쩍 들어올린다.
참모총장:어어, 류 대위! 왔네 왔어. 이야~ 이렇게 차려 입으니 또 새롭군. 여기 온 사람들 중에 미혼인 처녀들이 아주 많은데, 내가 좀 소개해줄까? 내 면도 서고 말이지. 하하!
류재관:......괜찮습니다. 이미 있습니다.
면 세워드릴 일은 그것이 아니어도 많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옆에서 잘 보필하겠습니다.
참모총장:하하하! 그래, 류 대위 자네가 있어서 아주 든든해.
그 뒤로는, 회식 자리에서 상사 비위를 맞추는 것과 비슷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감수성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데에 적당히 편을 들어 주고,
같은 테이블에 앉거나 주변을 오가는 상관들과 인사를 하고…….
그러던 중 옆 테이블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렸다.
: 글쎄, 대통령 각하께서 나를 얼마나 신임하시는데!
그 말을 들은 참모총장이 킬킬거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숫제 껄껄대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한편 때맞춰 무대 쪽 스크린에 대통령의 축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류재관이 최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화면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숙여 속삭인다.
로맹 바투타 대통령이... 저런 특별 담화 등에 단독 촬영된 것 외에, 사람이 많은 자리에 직접 나온 것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강헌:아니... 나도 촬영본 말고는 본 적이 없는데.
...그럼 저는, 슬슬 저 자의 시선을 끌어보겠습니다. 형도 준비하십시오.
류재관:제가 다칠 일이 뭐가 있습니까. 형이야말로 조심 하십시오.
류재관과 참모총장이 술을 한 잔씩 주거니받거니 하며 분위기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류재관:참모총장 님, 저기 서버가 테이블 게임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만. 만칼라를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한 수 가르침 받아도 되겠습니까?
그 틈을 타 류재관은 최와 인이어 너머의 요한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인다.
류재관:만칼라는 돌을 여러 개 가지고 하는 게임이니까, 참모총장이 돌을 쥐면 지문이 남을 겁니다.
하나만 빼돌려서 위치로 스캔 하십시오. 요한 선배에게 보내시면 지문을 따 줄 겁니다. 제가 게임으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테니, 당신은 지문 딴 것을 들고 공관 침입해서 서재를 살펴 보면 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이강헌:내가 그것부터 불가능하면 시작도 안 했지. 나 못 믿어?
그럼, 부탁 드립니다.
최의 대답을 들은 후 류재관은 서버에게서 만칼라 도구를 받아 와 테이블에 깔았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한 수씩 충고를 던지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졌다.
참모총장이 돌 여러 개를 쥐고 통에 넣으면서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강헌:
민첩
기준치: |
65/32/13 |
굴림: |
83 |
판정결과: |
실패 |
민첩
기준치: |
65/32/13 |
굴림: |
2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훔친 돌을 스마트워치 카메라나 착용한 렌즈를 통해 돌을 스캔해 그 정보를 요한에게 보낸다.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 다 들리나? 이강헌, 너한테는 공관까지의 최단경로를 보냈다. 생체반응을 스캔해서 사람이 적은 경로만 골라 보여 줄 거야.
너희가 있는 전시장 지하에 차량을 마련해 뒀다. 타고 4분 정도만 달리면 바로 공관이야. 감시가 붙지는 않겠지만, 조심해라. 지문은 지금 따는 중이니 공관 도착하기 전까지 보내 주마.
최는 화장실 핑계 등을 대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에는 사람을 두엇 마주치긴 했지만,
행사 참여자가 건물을 돌아다니는 게 수상한 일은 아니니 별 일이 없었다.
요한이 준비했다는 차량번호를 확인해 차에 탑승한다.
공관촌까지는 경로를 따라 가니 요한의 공언대로 딱 3분 55초가 걸렸다.
참모총장의 사택인 만큼 으리으리한 저택에 가까운 집이었다.
형형색색의 선인장과 특이한 식물들이 널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정원을 통과해 안쪽 문으로 향하자.
요한 에를리히:내부 스캔을 해야겠는데……. 보안이 상당히 강력하네. 뭐 눈에 띄는 거 없나?
현관 앞에는 신발 여러 켤레, 우산, 발판 깔개, 그리고 로봇 청소기가 있다.
로봇 청소기는 집 구조를 직접 스캔하여 경로를 설정하는 기기이므로,
이 데이터를 내려받는다면 내부 구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강헌:여기 로봇 청소기가 하나 있는데, 이걸 쓰면 되지 않을까요?
요한 에를리히:오, 좋은 생각. 신호 들어온다. 5초만 기다려.
다운로드… 됐다. 여기서 어디가 서재인 거지? 아, 2층 오른쪽 두 번째 방 같은데.
손가락이라도 잘리면 어쩌려고 지문으로 모든 걸 해결해 둔 걸까?
내부로 진입하자
태블릿 PC 두 대, 수기 문서, 책상 서랍, 책장이 보인다.
요한 에를리히:잠깐. 책장은 조심해서 건드려. 뭔가 있는 것 같아.
특정한 책을 뽑으면 경보가 울린다거나 하는 시스템인 듯하군. 놔두고 다른 것부터 살피도록 해. 다른 쪽에는 그런 게 안 보인다.
태블릿 한 대는 배경화면이 가족사진이고, 잠겨 있다.
가죽 케이스 안에는 ‘23일 9시 환경부 장관과 오찬’ 따위의 메모도 남겨져 있다.
이 태블릿을 굳이 살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른 한 대는 좀 더 공적으로 사용하는 모양인지 국방부 스티커가 붙어 있다.
방위사령부에 공식적인 경로로 출입할 땐 카메라 렌즈에 늘 붙이는 스티커니까.
이 태블릿은 지문 스캔 방식으로 잠금을 풀 수 있고,
개요 : '프로젝트 아난시' 관리자 닥터 아놀드 경질 이후 실험 자체의 질적 향상과 시스템 개선을 꾀하고자 함
그 다음부터는 군사암호와 일반 문장이 섞여 있어 단번에 읽어낼 수가 없다.
최도 시간이 있다면 해독이야 할 수 있겠지만,
류재관:게임이 곧 끝날 것 같습니다. 시간은 더 끌어보겠지만... 서둘러 주십시오.
내용을 보고하자 요한은 블루투스로 파일을 최의 스마트워치에 옮겨 와 달라고 요청한다.
간식을 보관하는 곳인지 믹스커피 등이 나뒹군다. 별다른 건 없다.
요한 에를리히:잠깐, 그거 아직 건들지 마. 해독 못 했다. 저쪽 수기 문서부터 확인 해보도록.
대통령 관저 스와콥문트 이관 계획위 필요성에 따라,
스와콥문트로 이동하는 쪽이 보안 유지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앞장이 더 있는데 그건 어디론가 사라지고 뒷장만 남은 것 같다.
류재관이 다급하게 한 차례 더 ‘참모총장이 형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한다’고 전달한다.
류재관:...미리 협의한 대로 소란을 일으켜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 전시된 크리쳐 로봇 중 하나를 폭주시켜서 작은 소란을 만드는 방안인데,
최가 한 시간여나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들키는 것보단 그게 낫다는 것이다.
요한 에를리히:할 수야 있는데 괜찮겠냐? 니 페어는 알아?
류재관:......다칠 일 없을 겁니다. 형, 믿어주십시오.
이강헌:......그게 더 나은 것 같으면, 마음대로 해. 나도 너 믿으니까.
류재관:예, 감사합니다. 요한 선배, 저 준비 됐습니다.
쾅!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쿵, 쿵, 건물 울리는 소리,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파티장에 들어오기 전, 류재관은 허벅지 가터에 에너지 운용 권총을 찼었다.
그렇다고 해도, 구현자 없는 설계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미로 속에서 경로를 찾듯이 ㄷ자 형태로 꺾여 올라갔다가,
채찍처럼 날카롭게 바닥으로 내려쳐지는 에너지.
유량이 얼마나 거대하고 풍부한지 각성자라면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건물 전체가 황금색 에너지에 감싸여 일렁거릴 지경이었다.
2층 회랑 한 쪽이 무너져 있어서, 건물 바깥에서도 안이 잘 보였다.
담을 넘어 부속지 같은 팔을 휘젓는 크리쳐 로봇에게 권총도 없이 손짓만으로 에너지를 갈겨 터뜨렸다.
구현자 없는 설계자, 저 전능한 설계를 보아라.
류재관이 뽑아내는 에너지가 최의 도깨비불과 무척 흡사한 형태라는 것을.
실은 부서진 벽 조각을 밟고 교묘하게 올라타 있었다.
어쨌든 기자들이 사진을 뽑기엔 아주 좋은 구도가 되었을 것이다.
완전히 부서진 크리쳐 로봇의 잔해를 마저 치우고는
류재관:오셨습니까? 다들 대피했으니 의심 받으실 일 없습니다.
이강헌:새삼 너 돌아오고 나서 안 그랬던 적이 없지만, 오늘도 여전히 인기 많겠다.
류재관:...형한테 정말로 그렇게 보였습니까?
류재관: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당신 눈에만 좋게 보이면 됩니다.
이강헌:그럼 잘 보일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되겠다.
일단, 가져오신 자료는 요한 선배한테 넘기고 저희도 돌아갑시다.
이강헌:그래, 빨리 가자. 이런 곳 너무 오래 있어도 좀 그래.
최가 빼내 온 '프로젝트 아난시' 관련 문서를 요한이 해독하는 동안,
그동안 류재관과 최는 각성자사관학교로부터 실습 강연 요청을 받게 되었다.
실전에 나선 선배 페어들은 대부분 전장에 투입되어 있으니,
페어를 맺고도 두 사람이 카사블랑카에 머물고 있는 틈을 타
별달리 연설 같은 것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고,
기술 시연 정도야 보여주지 못할 건 없다는 게 류재관의 생각이었다.
애초에 상부 지시를 거절할 수도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각성자사관학교로 향하게 되었다.
순수하게 이능력을 테스트해볼 수 있도록 강도가 드센 재질로 만든 교실이었다.
3교시짜리 수업에서 교수의 한 시간 강의가 끝나고,
류재관이 먼저 나서서 학생들을 상대로 설계에 관한 요령 등을 알려 준다.
류재관:…그래서, 경로 계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시야를 깨끗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는, 시력이 좋고 나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목표물을 겨냥하는 마음가짐에 흔들림이 없이, 하나 만을 생각해 집중해야 함을 뜻합니다.
잡념이 없을 때, (손바닥 위에서 정순하여 불꽃 같은 에너지가 피어났다.) 에너지는 가장 순도 높은 열기를 가집니다.
여러분은 아직 정식 페어가 없지만, 임시 페어와의 합을 맞추면서 요령은 어느 정도 터득했을 겁니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서 줄을 서 보겠습니까? 저쪽 끝에서, 여기, (세워 둔 과녁을 가리켰다.) 여기를 가장 정중앙에 가깝게 맞추는 페어가 점수를 가져가는 방식입니다. 저희가 먼저 시범을 보이겠습니다.
류재관이 만든 경로를 따라 최의 불꽃이 화살처럼 쏘아진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류재관과 최의 협력에 경탄했다.
이 깔끔한 설계와 우아한 구현은 각성자라면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는 방식으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학교를 일찍 떠난 류재관은 물론이거니와 최와도 재학 기간이 겹치지 않아 아는 얼굴들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이야기고, 앉아 있는 후배들은 모두 둘을 알았다.
4년 전 학내 시위 이후 두 분파로 갈라진 세력은
저마다 겉으로 보기엔 별문제가 없는 동아리를 형성해 각자의 세력을 내세웠다.
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을 그대로 계승한 축이 전통음악 동아리였다.
자기 자리 옆에 작은 젬베를 내려 둔 학생 하나가 손을 들고 일어섰다.
: 선배님께선, 외람되지만, 4년 전 학내 시위 중 끌려가신 후 계속 '괴뢰 정부'(라고 발음할 때 학생은 굉장히 냉소적인 어조를 사용했다.)에 붙잡혀 계셨던 걸로 아는데요. 이능력을 어떻게 그렇게 다듬으셨습니까?
그 침묵 가운데에서 건너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대들듯이 반박했다.
: 재능의 영역이라는 것도 있잖아! 넌 맨날 실습 점수 하위권이니까 질투 나냐, 마르보?
그러자 마르보라는 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르보: 나는, …나는 정보의 차이를 두고 하는 말이야! ‘충성하는’ 자들에게 좀 더 능력을 개화하기 쉬운 법을 알려 줘서 자기 사람으로 키운다는 말도 있잖아.
마르보는 돌아 돌아 결국 류재관이 정부에 충성하는 것을 비꼬고 싶었던 듯하다.
류재관:......정숙 하십시오. 저의 경우, 내면의 에너지를 정순하게 가다듬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였습니다. 이는 개인의 훈련 방식과도 연관된 부분이겠지만, 결국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는 것 또한 훌륭한 각성자가 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음, 당신도 한 마디 하시겠습니까?
이강헌:할 말 꽤 있었는데, 방금 때문에 싹 잊혔어. 괜찮아.
학생들은 최와 류재관이 얼마나 이능력을 잘 운용하던지 저마다 감탄하며 재잘재잘 강의실을 나섰다.
류재관은 1학년 때 지도교수님이 잠시 보자고 하셨다는 등의 사유로 잠깐 자리를 비운다.
최 또한 1층 로비에 앉아 류재관을 기다리고 있을 때쯤,
릴리안 웨즐리:저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아까 강의 들었던, 릴리안 웨즐리라고 합니다.
이강헌:아, 안녕. 뭐 때문에 왔어? 아까 내 옆에 있던 애 찾는 거면, 지금 없는데...
잔뜩 긴장한 그는 대뜸 태블릿 패드를 내밀었다.
릴리안 웨즐리:저, 사, 사인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니까… 패, 팬이어서요! 제가! 선배님하고, 류재관 선배님하고…….
이강헌:......나까지? 유명한 건 내 페어인데?
릴리안 웨즐리:옆에 잠깐 앉아도 될까요…? (상당히 예의바른 거리감을 가지는,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치 넉넉한 옆자리를 가리킨다.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앉아 목소리를 조금 낮춘다.)
저, 실은… 인자미나 아시죠? 선배님들 1학년이실 때에 꽤 유명하셨어서…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자, 잘 모르는 사이에 겨우 사진 몇 개만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요, 굉장히 동경했거든요.
최 또한 설계자 없는 구현자라는 제약에도 무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단 사례가 있지만,
류재관 만큼의 유명인도 아닐 터인데 동경할 이유가 있나?
릴리안 웨즐리:지금까지 임시 페어를 몇 번이고 거쳐 보았는데, 저는 동조율이 하나같이 몹시 낮아서……. 선배님들께선 오랜 기간 떨어져 계셨는데도, 각자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으신 것 같고… 그래서 오늘 수업을 듣고 더 감탄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시간이 없으신 게 아니라면… 몇 가지만 더 여쭤 봐도 될까요?
이강헌:뭐, 조금 신기하긴 하지만... 보통 사람마다 깨닫거나 동경하는 지점은 전부 다르니까. 그럼 사인은 나중에 하고, 뭘 물어보고 싶은데?
릴리안 웨즐리:헉, 가... 감사합니다! 그게요-
릴리안이 그렇게 입을 떼던 순간에, 난데없이 복도 저쪽 끝이 소란스러워졌다.
: 꺅! 악! 으악! 난 귀신은 괜찮아도 벌레는 질색이란 말이야!
복도에서, 로비로, 거대하고 꿈틀거리는 다리와 더듬이,
어디로 보나 보편타당하고 완전한 바퀴벌레가 기어 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의 크기가 4m쯤 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이성을 갖춘 학생들은 그 안에서 키잉거리는 엔진 소리를 들었으므로,
이것이 연습용 크리쳐 로봇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본능적인 혐오감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상한 실험으로 학내 사고의 주요 원인이 되곤 하는 연구부가
그 폭주 로봇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걱정은 모든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들었다.
그 또한 4m짜리의 바퀴벌레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듯 보였지만,
그보다는 학생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선 듯 하다.
학생들을 전부 자신의 뒤로 물린 그가 손을 들어올린다.
눈이 달린 것 같지는 않았지만 크리쳐 로봇이니 감지 센서가 있는 건 당연했다.
폭주 직전이었던 바퀴벌레는 놀랍게도 갑작스레 입을 쩍 벌리고
몸을 구부려 뒤로 돌아 류재관에게 달려들었다.
류재관이 활약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온 후배들이 대다수였으니까.
한두 사람 나와 있었던 교수들이 달려오기는 했지만,
류재관이 손을 들어올렸으므로 그를 믿고 기다리는 기색이었다.
놀라우리만치 정교한 설계가 손 안에서 피어나지도 않았다.
류재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양 놀라 굳어 있었다.
이강헌:
이능력 Roll
기준치: |
90/45/18 |
굴림: |
8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지를 발휘해 던진 사과에 맞은 바퀴벌레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져 꿈틀거렸다.
류재관:저, ...이능력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이강헌:그러니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이런 적 없었잖아.
류재관: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눈치로 류재관이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릴리안 웨즐리:제가 보건위원인데, 지금 의무실이 잠깐 잠겨 있을 거거든요. 열어 드릴 테니 가시겠어요?
이강헌:이대로 그냥 두면 그게 더 안 좋을 수도 있어. 너도 있으니까 일단 가고 나서 상태 살피자.
류재관:능력 자체가... 사라진 기분은 아닙니다. 에너지 흐름도 평범하게 느낄 수 있고요.
그런데, 갑작스레 이유 없이 이능력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누가 호흡을 차단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강헌:...최근에 어디 불려 가거나 한 건 없어? 감시한답시고 너한테 수작 부려놨을 수도 있잖아. 네가 요즘 비교적 자유롭게 외출하기도 했고, 움직임이 수상하다거나... 무슨 이유로든.
류재관:상부에 불려가 따로 검사를 받거나 무언가를 주입 받은 적은 없습니다. 다만, 짚이는 점이 있는데...
얼마 전 자선 파티 때, 제가 큰 힘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큰 능력을 과시해본 건 저로서도 처음이었습니다.
실은... 이렇게 단숨에 능력이 큰 폭으로 뛰어오르게 된 것부터가 애시당초 의도한 결과가 아니라 굉장히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강해지게 된 까닭은 노노이 라가힛과 얽힌 사건 때문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이강헌:...그걸 내가 어떻게 잊어. 너만큼 충격적이진 않아도, 그 사건 때문에 시작된 거잖아.
류재관:예, 그가 죽던 날 저와 요한 선배가 그의 피를 뒤집어 썼었지요.
그때부터 에너지 유량이 이상할 정도로 요동쳤었습니다. 리가힛이 무언가 수상한 실험을 받고 있었다는 건 그때 형도 같이 들으셨잖습니까.
4년 간 지나치게 늘어난 에너지를 쉽게 컨트롤 할 수 없어서... 저 또한 여러 번 목숨이 위태로웠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다스릴 방법을 찾느라 라가힛과 관련된 실험을 추적해 왔었고요.
...각성자의 능력을 강화시키는 뭔가라는 것밖에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혈액이 저와 요한 선배에게 영향을 미친 건 분명합니다.
이강헌:그런데 그건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낼 수 있게 해 주는 거잖아. 폭발적으로 내는 대신 에너지를 막을 수도 있는 거야? 아니면 부작용 같은 거야?
류재관:...에너지가 안정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그래서 형을 찾아올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런 큰 힘을 써본 건 자선 파티에서가 처음이었는데... 말씀대로 그 반작용이 닥친 건 아닐까 싶습니다.
아까 수업 때 시연한 이능력은 굉장히 작은 힘이었으니, 비유하자면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스마트워치의 남은 배터리마저 시연하며 다 써버린 게 아닐까... 싶은데.
......최 형, 혹시 손을 잡아봐도 됩니까?
이강헌:......허락 맡을 때 아니라는 거 알잖아.
류재관:저는 당시의 기억이 흐리지만, 설계 반동이 터졌을 때 형이 해주셨던 것처럼... 저한테 에너지를 밀어 넣어주십시오. 어쩌면 그것으로 안정 될 수도 있습니다.
이강헌:(몸을 숙여 거리를 가까이 한 채, 맞잡은 손에 힘을 실어 쥔다. 숨을 몇 번 고른 후에야 맞잡은 손을 통해 천천히 에너지를 흘려보낸다.) ......어때?
류재관은 저 스스로 몸이 어떠한지도 모르고 있다가,
페어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나서야 뒤늦게 장기 하나하나가 몹시 차가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류재관은 돌아온 날부터 반 년 내내 병자 같은 행색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몇 주간, 정확히는 다시 만난 날부터 조금씩 회복되었다.
이강헌:아무래도... 이런 말 또 하긴 싫지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나 봐.
류재관:예, 떨어지는 것 만으로도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면...
뭐, 단순히 페어라는 이유 때문도 있을 테고, 심리적인 문제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안 그렇습니까?
이강헌:볼 때마다 문제인 녀석인데 어떻게 알아? 아프지나 말지.
류재관:누군 아프고 싶어서 아팠습니까?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도, 누구 얼굴 생각해서 버틴 겁니다.
이강헌:그러게 누가 거기까지 가랬어? 잘하셨어요, 아주.
저 졸립니다.
류재관:어디 가지 마십시오. 손도 풀지 마시고요.
안심한 건지 류재관은 곧 풀어진 얼굴로 잠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보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릴리안 웨즐리:저, 선배님… 아, 방해하려는 건 아니고요……! 혹시 회복제가 필요하실까 해서요. 류재관 선배님이 놀라신 것 같아서…….
릴리안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농담 삼아 포션이라고들 부르는,
이강헌:아, 애가 지금 자고 있어서... 일단 두고, 일어나면 먹일게. 고마워.
릴리안 웨즐리:그, 선배님 주무시는데 방해될까봐 죄송하지만… 아까 하던 이야기가 저한테 되게 중요해서요. 선배님께 조언을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조심스러운 기색이던 릴리안은 눈치를 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입을 열었다.
릴리안 웨즐리:저, 사실 동조 장애가 의심된다는 소견이 있어서요.
릴리안 웨즐리:그런데 저는… 저는 꼭 멋진 각성자가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어, 좀 tmi(이 표현은 아직까지 살아남았다)인데요…….
저희 부모님이 각인하신 각성자 부부였다고 하시는데, 스와콥문트 시민이시거든요. 저랑 오빠가 아주 어릴 때 떠나 버리셨어요. 그 뒤론 연락도 끊어 버리시고…….
그래서 저랑 오빠는 오랫동안 부모님이 저희를 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직접 만나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요?
우연찮게 저도 각성자로 태어났으니까, 제가 공적을 세워서 시민권을 따려면 구현자로서 멋진 행보를 보여 주어야 가능성이 생기고……. 그, 그런데 이런 상황이니까요.
혼자서도 전투할 수 있는 노하우를 익혀야 해서……. 그래서 선배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릴리안 웨즐리:두 분의 동조율이 높은 것은 우연이나 어떤 조건 때문일 수 있지만… 선배님께서 페어가 사라진 상황에도 이능력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고 임관하신 건 선배님의 노력 때문이잖아요?
눈 안에서 신뢰가, 동경이, 반짝거리는 경탄이 빛났다.
릴리안 웨즐리:저는 강해지고도 싶지만… 이 능력으로 사람들을 도와 주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도 싶어요.
뭐, 딱히 누가 뭐… 세상을 구해라! 하고 예수님처럼 시킨 건 아니지만요, ……오빠도 각성자인데 질 수 없어서요!
저는 선배님 덕분에 용기를 많이 얻었거든요. ……저어, 예전에 사관학교 시위 있었을 때에도 계셨다고 들었어서요.
동경할 거라면 류재관을 좇아가지, 최에게 이럴 건 뭐란 말인가.
최가 류재관 없이 졸업한 게 딱히 최 본인의 선택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한 일도 아니거니와 학내 시위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릴리안은 거기서 느낀 게 있는 모양이다.
릴리안의 일방적인 동경을... 최는 어떻게 느낄까?
이강헌:그런 건... 아마 날 동경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야. 겸손한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를 동경하고 배움을 얻어내고 싶은 거면, 네가 원하는 바와 일치하는 사람을 동경해야 맞을 거야. 그리고, 너한테 맞는 사람은 나보다 내 페어라는 거지. 걔도 너처럼 비슷한 사정이 있었으니까... 아마 그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확실해.
무엇보다 나는, 내가 노력하고 싶어서 노력한 게 아니거든. 근데 당시 상황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사실 어떻게 했다는 것도 모르겠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마음이었거든.
너한테는 좀 아쉬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그렇게 느껴져. 어떻게 안 될까? 네가 가망성이 없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너한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둘 다 좋을 게 없는 거잖아. 특히 너한테는 더.
릴리안 웨즐리:아닙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횡설수설했죠. 동경하는 분들을 두고 이런 얘기를 털어 놓으려니 주체가 안 되는 기분이에요... 저, 선배님! 저도 류재관 선배님이 정말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강헌 선배님이 해오신 노력이 덜 빛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저는 구현자라서요! 구현자 없는 설계자도 대단하지만 설계자 없이 그토록 아름다운 구현을 보이셨던 이강헌 선배님을 좀 더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님께서 설계 없이도 이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훈련을 하셨는지도 궁금했고... 그리고, 음...... 두 분은 시위에 나갔을 때와 지금, 마음가짐이 여전히 같으신지 궁금했어요.
아, 뒤에 건 그냥... 그냥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꼭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저는, 되게 오랫동안 두 분을 동경했거든요. 그래서 아직도 같은 마음이시라면, 저도 부끄럽지 않도록... 기왕 가지고 태어난 힘을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게 최선을 다 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해요.
이강헌:누군들 노력이 빛나지 않는 건 아니지. 그래도 네 노력을 더 빛내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었어. 넌 굳이 내가 아니어도 충분히 성장할 수 있을 애인 것 같으니까! 보통 마음먹는 거로만 끝날 때가 많거든. 이렇게 열심히 하지도 못하고.
나는 혼자서도 강해지기로 마음먹는 것부터 내 의지가 아니었어서...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노력하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었거든. 분명 자의가 아닌데도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자꾸 들어온다고 하나? 그렇게 죽어라 했던 것 같아. 아마 이게 자의가 되면 더 강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너도 그 느낌을 받을 날이 오지 않으려나?
시위는 아마도... 그날 있던 사람들이 전부 여전한 마음일 거야.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도 있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있고. 똑바로 대답하자면, 일단 나는 평생 똑같다는 거? 그날의 마음가짐이 내 원동력의 일부인 셈이지.
릴리안 웨즐리:그렇군요. ...그럼 선배님께서 생각하시는 '옳은 것'은 예전과 같은 것이겠네요? 아, 물론 달라지신다고 해도 나쁜 건 아니지만요. 사람 생각은 계속 바뀌는 거니까요.
그치만 전 역시...... 엄마,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정의로운 선택을 하고 싶어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요. 그리고 누굴 만나더라도요!
릴리안 웨즐리:제가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겠냐 싶긴 하지만요. 하지만 원래 영웅은 그런 데에서 시작되는 거잖아요.
…(일어서면서) 읏차. 시간을 너무 오래 뺏어서 죄송해요. 선배님, 제가 두 분 오래 팬이었으니까… 그냥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있는데요.
들고 왔던 태블릿 PC를 품에 소중히 안은 릴리안은 볼을 붉히고 말한다.
릴리안 웨즐리:팬이 연예인한테 말한다고 생각하고 들어 주세요.
앞으로 힘든 일이 있으시더라도,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자고 이런 걸 하고 있나’ 싶은 시간이 오시더라도, 순간순간 응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후배들이 선배님들 동경하고 좋아하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선배님들께선 저희 하나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되어 주시고 계신 거예요. …그러니까 건강하셔야 해요!
이강헌:...으하핫! 나중에 영웅이 되면 사람들이 줄을 설 텐데, 내가 사인할게 아니라 네 사인을 미리 받아둬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도움을 직접적으로 주지는 못해도...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 너도 건강하고 다치면 안 된다? 그때 마주치면 꼭 사인해 주고!
느, 네! 건강하세요! 류, 류재관 선배님께도 꼭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런 후에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문이 쾅! 닫힘과 동시에, 최를 쥐고 있던 류재관의 손이 움찔거린다.
힐끔 보니, 눈 꾹 감는 게… 필사적으로 자는 척 중인 것 같다.
이강헌:...너 어디 가서 연기하면 안 되겠다. 그렇지, 응?
큼.
이강헌:릴리안만 들을 수 있는 거였는데, 안 자고 들었으니까~ 빨리 방청비 내놔.
류재관:...말미에 깬 거라 형 말은 제대로 못 들었습니다.
이강헌:원래 그래도 걷는 건데, 그럼 이번만 봐줄게.
오늘 아침에 요한 선배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혹시... 카사블랑카를 떠나려면 형에게 준비 기간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 같습니까?
이강헌:음, ...최소 하루?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니까.
류재관:음, 그럼... 넉넉하게 사흘 후에 진행하도록 합시다. 선배가 참모총장 공관에서 가져온
'프로젝트 아난시' 관련 문서를 절반 정도 해독하는 데에 성공하셨답니다.
뒷부분은 아예 문서가 파쇄되어 읽을 수 없다고 하니... 알아낸 바에 따르면, 방위사령부 지하에서 뭔가 부적절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난시'라면, 옥수수알 한 알을 가지고 사람 백 명과 맞바꿨다던 아프리카 도곤족 신화 속 신의 이름입니다. 분명, 이유가 없는 명명은 아닐 겁니다.
저희가 학생일 적 소문으로만 돌았던 아놀드 박사를 기억하십니까? 아놀드 박사가 그 실험 총책임자였는데, 뭔가 크게 반발을 했다가 숙청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프로젝트는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는 자동화 프로토콜에 돌입했다는 게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실험실에는 사람이 전혀 없을 테지만, 로봇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실험에 대해 알아본 다음, 증거물을 챙길 수 있다면 챙겨 나오고, 그 길로 도시를 빠져나와 장벽 바깥에서 망명 정부 사람들과 접선해해 나미브 사막으로 가는 게 지금의 계획입니다.
이강헌:난 이미 동의한 지 오래됐어. 안 한다고 한 적도 없다고. 이미 너랑 같이 가기로 한 순간부터 다 동의한 거야.
류재관:...그렇게 말씀 하셔도, 저는 때마다 형의 의사를 물을 겁니다. 그건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이강헌:다 좋으니까 그만 좀 물으라는 거잖아. 너한테 싫다고 한 적 없거든?
...너 갔을 때 빼고.
류재관:...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괜히 초 치는 소리가 될 것 같으니까 삼가겠습니다.
이만 정리하고 갈까요. 슬슬 허기집니다.
이강헌:너 신생아야? 참는다길래 다 큰 줄 알았는데.
이강헌:아아, 안 들린다~ 안 일어나면 맘마 없어~
그간 두 사람은 현금을 조금씩 바꾸거나 짐을 싸는 등 티나지 않게 준비를 마치고,
중간중간 임무에도 얼굴을 비추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보초를 서던 헌병대도 꾸벅꾸벅 졸 시간이었다.
뭔가를 지키고 있다는 티를 내면 지하실 존재가 들통나니
아예 입구 안쪽에서 로봇들로 경비를 서는 것 같았다는 게 류재관과 요한의 분석이었다.
요한 에를리히:들리나? 입구에 경비 로봇이 있을 텐데, 그 로봇들 상대만 조용히 좀 해 주면 걔네들 통해서 내부 설계도를 다운로드해 보겠어. 부탁한다.
인이어 너머에서 바쁘게 무엇을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히 문이 열린다.
지하 출입 권한이 있는 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킨 모양이었다.
실험실로 향하는 주요 입구에는 푸르고 조도 낮은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다중 보안 시스템이 설치된 것이 감각만으로도 느껴진다.
남은 것은 발 앞의 각성자 에너지 감지 장치다.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의 출입이 느껴지면 보안 로봇이 튀어나오는 구조라고 요한은 설명했다.
요한 에를리히:여긴 정면돌파밖에 방법이 없으니까, 로봇이 튀어나오자마자 조용히 처리하는 방법뿐인 것 같다.
단, 설계도를 다운로드할 시간이 필요하니 14초 정도 시간을 끌어야 해. 재관이가 설계를 열면서 동시에 발을 내딛어라. 그리고 이강헌 네가 위에 에너지 구현을 얹어. 로봇은 부숴도 괜찮지만, 시간만 좀 끌어 줘.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구현자는 이능력 판정을 시행한다.
류재관:
항법
기준치: |
90/45/18 |
굴림: |
92 |
판정결과: |
실패 |
이강헌:
이능력 Roll
기준치: |
90/45/18 |
굴림: |
8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두 사람의 설계와 구현은 정확히 맞아들어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로봇을 경계했다.
류재관이 한 발짝 내딛은 순간 굉장히 귀엽게 생긴,
고전 애니메이션 월-E에 나오는 흰색 로봇 같은 비주얼의 보안 로봇이 튀어나와
미리 설계된 경로를 따라 최의 구현이 쏘아지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로봇은 얼마간 팔을 떨다 액정을 깜빡거리며 이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요한 에를리히:…보안이 상당한데. 일부 구역은 아예 폐쇄되어 기록에 남질 않았어. 다운로드받을 수 있는 설계도가 이 정도였다. 일단 참고해.
경비 로봇: ……저는 제 할일을 다 했어요! 공격하지 마세요!
기술이 발전되면 인간과 닮은 로봇이 시장을 지배하리라는 과거의 예측과 달리,
로봇들은 귀엽고 단순한 디자인으로 점점 일원화되었다.
인간과 닮은 로봇을 개발하는 것은 여러 윤리적 관념상 굉장히 심한 규제를 받는 일 중 하나였다.
경비 로봇: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예요! 어떤 목적으로 방문, …….
라는 대사를 마지막으로 치지직 소리를 내며 꺼졌다.
류재관:...데이터 분석실부터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수집된 모든 실험 데이터를 저장하고 분석하는 곳처럼 느껴진다.
대형 서버 룸과 여러 개의 분석 스테이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보였다.
캐비넷 하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로봇이 케이스에 담겨 잠들어 있다.
중앙 실험실을 도식화해둔 듯한 원형 챔버가 모니터에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메인 PC다. 메인 PC는 잠겨 있다.
참모총장의 지문을 인식시켜 잠금을 풀 수 있다.
인공지능 제어 시스템인지 화면에는 대화 창이 떠 있다.
아무래도 주변을 둘러 보며 단서를 획득한 후에 물어볼 내용을 정할 수 있지 않을까?
류재관:아직 물어볼 만한 단서가 없으니, 주변을 좀 더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옆이... 제어실A 맞습니까?
이강헌:맞아. 여긴 나중에 다시 오고, 일단 제어실부터 다녀오자.
실험실의 모든 시스템을 모니터링하고 제어하는 곳처럼 보인다.
이강헌:
크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2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류재관:
크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82 |
판정결과: |
실패 |
내부로 먼저 들어간 류재관이... 끼어있는 최를 보며 웃음을 참는다.
거기가 편하신가 봅니다.
이강헌:살살, 완전 살살 빼. 지금도 좀 아파.
형이라고 부르면요.
너 취향 이상하다.
평생 거기 끼어 계셔도 됩니다.
이강헌:아니, 야! 조금씩 움직이지 마라? 너 나가면 혼나?
이강헌:
크기
기준치: |
60/30/12 |
굴림: |
90 |
판정결과: |
실패 |
따로 움직입시다.
그래, 그러지 뭐.
이강헌:4년 뒤에 보자. 그럼 합쳐서 8년인가? 그냥 강산도 변하게 2년 더 채워서 10년 만드는 거 어때?
......하 진짜.
이강헌:잘 사는 것 같은데? 떨어지기 싫다는 것도 거짓말이네. 와, 기사에서 이런 게 나와야 하는데.
투닥거림도 잠시, 두 사람이 들어서자마자 방 전체에 낭랑한 울림이 퍼졌다.
각성자 류재관, 이강헌. 현재 동조율 78%, 동조 효율 A.
이후로도 음성은 두 사람의 신체 정보를 몇 가지 더 읊고 풀썩 꺼졌다.
당혹한 요한이 “방금 뭐야?” 하고 묻던 때였다.
구석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안내 로봇 하나가 팔을 흔들었다.
안내 로봇:이리 오세요! 두 분의 신체 상태를 점검해 드릴게요, 각성자님!
요한은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 카메라로 비치는 내부를 파악하며 바쁜 판단을 내린다.
요한 에를리히:위해를 끼치는 종류는 아닌 것 같군. 단순히 신체상태를 점검할 뿐인 것 같아.
그러는 사이에 로봇은 류재관에게 달라붙어 팔 길이를 재고,
손을 내 보라고 하며 에너지 상태를 점검하는 등 소란스레 굴었다.
안내 로봇:오래 떨어져 계셨군요! 두 분은 정식 페어이신데도! 이러면 안 돼요.
동조율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페어 간 의존도가 강해진다구요.
지금까지 두 분이 페어인 데도 떨어져 있으면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류재관 님의 에너지 유량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에요.
최근에 에너지 파동이 갑자기 일치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재회한지 얼마 되지 않으셨군요?
류재관 님의 에너지 파동과 유량은 지금 굉장히 불안정해요. 안정시키려면 이강헌 님이 반드시 필요해요! 떨어지지 마세요!
이강헌:안타깝다. 이제 10년 채우려면 더 떨어질 텐데, 그치.
류재관:...알았다고요, 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내 로봇이 떠들어대는 동안 최는 내부를 조금 더 둘러볼 수 있다.
자동화되었다는 연구 프로토콜 탓인지 연구 일지라든지, 사람이 쓰던 물건은 거의 없다.
로봇 중 하나를 켜 보면 자연스레 액정에 불이 들어온다.
눈을 깜빡거리는 이모지를 화면에 내세우더니 하품을 하며 일어나는 게 퍽 '인간다운' 행동이다.
AECE:연구원 님! AECE 기상했습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강헌:안녕, 최근 연구 과정 좀 알고 싶은데. 진행되거나 미뤄진 이력 같은 거 있어?
AECE:대부분의 연구 과정은 데이터 분석실의 메인 PC에 담겨 있어요!
혹은 ‘프로젝트 아난시’ 의 개요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까요?
AECE:‘프로젝트 아난시’ 는 옥수수 한 알로 백 명의 사람을 먹여살렸다는 신 아난시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프로젝트예요!
한 명의 각성자로 ‘X각성자’ 80명을 만들 수 있지요. 중앙 실험실에서 자세한 내용을 열람하시겠어요?
이강헌:음... X각성자가 뭔지만 들어봐도 될까?
AECE:'X각성자'는 각성자의 혈액과 약품이 섞인 용액을 주사받아 파생된 일반인 출신 각성자입니다!
이강헌:오... 알겠어. 나머지는 중앙 실험실에서 볼게. 고마워.
이동하면서 복도 너머로 실험실처럼 보이는 공간 몇 군데를 지나치는데,
대부분 결벽적일 정도로 완벽히 정리되어 있다.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여러 개의 에너지 챔버와 복잡한 기계 장치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실험실 가운데에는 원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존재했다.
녹색으로 빛나는 유리관 안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액체가 가득 차 있다.
주변을 둘러 보면, 벽감을 따라 비슷한 유리관이 늘어서 있다.
마치 태아를 닮은 모양으로 배태되고 있는 어떤 존재들이 수십 개 있었다.
…가운데의
에너지 코어를 더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강헌:(가운데 놓인 에너지 코어로 다가가 가까이서 살펴본다.)
생명을 배아해 내는 빛깔, 녹색, 용액 안에 푸르게 잠들어 있는 심장.
검붉게 바랜 색상 위로 밝고 인공적인 초록빛이 감돈다.
심장은 아주 느린 박동을 지닌 채 떨듯이 뛰고 있었지만,
맥박을 전달해야 할 혈관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대동맥에는 실험 장치의 일부 같은 관이 붙어 있었는데,
AECE:‘프로젝트 아난시’ 의 핵심 에너지원을 보셨군요!
강력한 각성자였던 구현자 ‘유리 모하에’ 의 심장이랍니다.
이 심장에서 발산되는 혈액과 약품을 섞어 일반인에게 주사하면 거기서 파생된 ‘X각성자’가 탄생하지요.
지금까지 실험 성공률은 43%로 목표 수치인 55%까지 순조롭게 도달해 나가고 있어요!
여기 대동맥에 연결된 것은 엄빌리컬 케이블이에요.
이 케이블을 통해 전기 신호를 공급하면 뇌 없이도 심장이 혈액을 생성해 내는데, 신진대사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프로젝트 아난시’ 초반의 가장 힘든 지점이었답니다.
AECE:아놀드 박사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신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 께서 이번에도 옳으셨던 거죠!
그러나 유리 모하에는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어 저 홀로 머나먼 곳에서 빛나고 있다.
기일마다 열리는 추모제에서 학생들은 사상과 정치 신념을 떠나
적어도 교내에서 더는 이러한 비극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데에 뜻을 모아 왔다.
누구도 그의 심장이 이런 모독적인 용도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류재관이 파래진 안색으로 돌아서더니 헛구역질을 하는 듯 등이 크게 흔들린다.
요한 에를리히:…두 사람 다 왜 말이 없어? 로봇이 뭐라고 말하던데, 잘 안 들렸어. 뭐가 있는데?
요한 에를리히:...뭐야? 왜, 무슨 일인데?
요한 에를리히:그래, 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냐?
이강헌:아니, 아니요. 별 게 없길래 살펴보느라 그랬어요. ...마저 보겠습니다.
여전히 안색이 좋지 못 하지만 입가를 틀어 막은 채 고개를 흔들고 있다.
선배님, 그러니까... 유리 선배님의 심장으로 프로젝트 아난시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요.
각성자인 유리 선배님의 심장에서 나오는 혈액으로 80명의 새로운 일반인 각성자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는 통신이 끊겼는가 의심될 정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에 눈감고만 있었으면 이 풍족한 도시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갔을,
지금의 우리보다도 어렸던 청년에 대해 떠올려 보자.
아무도 그에게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라 시키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에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여러 비밀을 일러 주고,
불길처럼 삶을 태우며 분투하다 지금 여기 차가운 용액에 갇혀 비참한 꼴로 떠 있다.
죽어가던 순간에 유리 모하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오래도록 감정을 정돈하지 못하던 요한은 겨우 말 한 마디를 뱉어 냈다.
요한 에를리히:유리가…… 유리의 심장이 그 실험의 핵심 재료라면, 전략적으로 당연히 파괴… 파괴해야 한다.
부술 수 있다면… 그래도 경보 시스템 같은 것에 걸리지 않겠다고 판단되면…….
요한 자신에게 상황을 들려 주고 납득시키기 위한 일처럼 보였다.
…파손 없이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법은 없을까?
AECE:그건 제 권한이 아니에요! 메인 PC의 아난시 시스템 전체 관리자에게 물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류재관:이게... 이게 사람이 할 짓.......
대체 유리 선배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윽.
아니, ...일단 가서 제대로 알아봐야겠죠.
이강헌:힘들면 조금 쉬고 있어. 내가 할게, 응?
류재관:형이라고 안 힘들겠습니까? ...아닙니다. 같이 봐요, 끝까지.
데이터 분석실 메인 PC의 대화창에 여러 질문을 입력하여 세계관과 관련된 답변을 받을 수 있다.
류재관:...프로젝트 아난시에 대해 먼저 묻겠습니다.
이강헌:...응. 그게 도의적으로 가장 중요한 거니까.
‘프로젝트 아난시’는 옥수수 한 알로 백 명의 사람을 먹여살렸다는 신 아난시에게서 이름을 부여받은 프로젝트입니다.
각성자의 이능력은 혈액과 관련이 깊다는 연구 결과가 밝혀진 후
‘그렇다면 수혈 등의 방식으로 비능력자를 각성자로 만들 수도 있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되어 출발했습니다.
총책임자 아놀드 박사님께서 실험을 지휘하던 시기에는
각성자들에게 기증받은 수혈팩을 사용해 적은 양의 혈액으로 연구를 이끌어 나갔으나,
다량의 혈액 내지는 장기를 이식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변경되었습니다.
이것이 4년 전의 일로, 아놀드 박사님께선 이 방침에 반발하였다 책임자 위치에서 경질되셨습니다.
이후로는 실험 전체가 자동화 프로토콜에 돌입했습니다.
류재관:그렇다면, 현재 실험의 효과는 어떠하지?
4년 전 입수한 실험체 ‘유리 모하에’ 의 심장을 에너지 코어로 삼아,
한 명의 강력한 각성자로 ‘X각성자’ 80명을 만들 수 있다는 결과가 산출되었습니다.
류재관:...X각성자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정보를 요청한다.
각성자로부터 파생된 인공 각성자의 명칭입니다.
개체가 가지고 있던 기본 역량에 따라 X각성자들의 특징이 모두 다릅니다만,
X각성자들은 대부분 검붉은색 에너지 색상을 나타냅니다.
형, 노노이 라가힛이 설계 반동 터졌을 때... 그의 에너지 색이 이런 색이었습니다.
노노이 라가힛은 N-28 실험체로, 6년 전 처음 각성자의 혈액을 이식받았습니다.
혈액 이식만으로도 반응을 보인 특이한 케이스로 성장하면서 단계적으로 혈액을 더 주입받아
X각성자들 중에서는 가장 두드러지는 에너지 유량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비각성자의 신체가 그 과부하를 견디지 못해 사망했습니다.
에너지 코어를 꺼낼 수 있는 방법은.
류재관:...혹시, 너희가 말하는
아버지인가?
‘최초의 설계자’ 에 대해 모르는 당신은 누구죠?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경비 시스템을 개시합니다.
문장이 완성됨과 동시에 에너지 코어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방화문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내려가 퇴로를 차단했다.
강력한 에너지의 흐름이 두 사람을 내던진다…….
인이어 너머에서 외치는 요한의 목소리에 눈을 뜬다.
정신을 차리니 최는 무너진 캐비넷 옆에 처박혀 쓰러져 있었다.
이강헌:...들려요. 저, 저 이제 일어났, 어요.
요한 에를리히:...하, 다행이다. 류재관 너는, 들려? 걔 지금 옆에 있나?
류재관:......예, 저 정신 차렸, 습니다. 같이 있지는 않습니다.
방화문에 의해 격리된 상태고, 실험실 내부 경비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바람에 출구가 봉쇄된 것 같다.
중앙 컨트롤 시스템이 전체 실험실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즉각 차단하고,
비상 상황에 대비한 내부 보안 프로토콜을 활성화한 모양이었다.
정보가 더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인 듯했다.
요한 에를리히:경비 시스템을 해결할 수 있을지 살펴볼 테니, 너희도 탈출 경로를 모색해 봐!
상황이 다급한 탓인지 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요한이 이를 악문 채 내뱉었다.
모든 전력이 비상 시스템으로 전환되었는지 온통 캄캄하여,
비상등이나 일부 용도를 알 수 없는 버튼에만 옅은 불빛이 들어와 있다.
요한 에를리히:추가 보안 시스템이 가동된 것 같아. 뭔가 달라진 것 있나?
무색무취였지만, 분명 바람 같은 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강헌:바람이... 바람이 나오는 것 같은데요.
동시에 류재관 쪽에서 다급한 통신이 들려온다.
류재관:선배, 이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강헌:...신체 스캔에 나온 것 때문에 일부러 떨어뜨려 놓은 건가?
이강헌:
이능력 Roll
기준치: |
0/0/0 |
굴림: |
23 |
판정결과: |
실패 |
이강헌:능력이 안 나와요. 바람에 뭐가 있는 것 같은데...
능력도 사용되지 않고, 사방은 방화문이나 기물로 고립되어 있는데 전력마저 끊겨 있다.
두 사람이 탈출하려면 봉쇄된 출입로를 열 만한 전력 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강헌:
관찰력
기준치: |
75/37/15 |
굴림: |
5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이것을 통해 벽에 설치된 배전함 같은 장치를 찾는다.
류재관 쪽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았다는 연락이 온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배전함을 열어 스마트워치로 요한에게 내부 구조를 전송해 주어야 한다.
이강헌:
운
기준치: |
77/38/15 |
굴림: |
96 |
판정결과: |
실패 |
손놀림
기준치: |
60/30/12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열쇠공
기준치: |
45/22/9 |
굴림: |
2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배전함을 여는 것에 성공하여 요한에게 내부 구조를 전송한다.
요한 에를리히:그 장치는……. 아래쪽에 긴 플러그가 있을 거다. 끝이 날카롭고 굉장히 긴 모양이 맞나?
내용을 전달하자 요한은 더욱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둘 중 한 사람이 채근한 후에야 답을 이어 나간다.
요한 에를리히:그건... 그 플러그는, 엄빌리컬 케이블의 일부다.
비상 에너지 공급장치인데, 동력원이 각성자의 에너지다.
지금 너희 두 사람은 가스 때문에 이능력을 사용할 수 없고, 그 실험실 전체의 봉쇄를 풀 정도로 큰 전력을 일으키려면 아까, 유리처럼……. 플러그에 직접적으로 각성자의 에너지원을 접촉시켜야 하는 것 같다.
…혈액이나, 심장을…….
…각성자가 침입했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것처럼 보이는군.
봉쇄 때문에 1차적으로 탈출이 불가능하고, 탈출하기 위해 전력을 공급하려면 동료나 자기자신을 다치게끔 해야 하니까.
이 공간에서 나가려면 누군가는 심장이든 어디든 날카로운 플러그 끄트머리를 찔러 넣어
배전함에 혈액을 공급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설마?
요한이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냉정한 목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에너지 유량으로 계산했을 때… 한 사람분의 에너지로는 실험실 봉쇄를 해제하는 정도가 가능하고,
두 사람 분의 에너지가 공급된다면 실험실 자체를 무너뜨리거나 코어를 손상시킬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실험은 완전히 중단될 테고, 저 심장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도 더는 없겠지.
만일 지하가 무너진다면 방위사령부에서 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니 파급력도 클 거다.
......각성자는 일반인보다 회복력이 강하니 치명상을 입어도 당장 죽지는 않는다.
요한 에를리히:…하지만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분명 크게 다치게 될 테고, 그것보다 더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들려준 것뿐이지 너희들이 이런 선택을 하길 결코 바라지 않는다.
내가… 내가 최대한, 다른 방법을 찾아 보겠어.
한 사람이 희생한다면 다른 사람은 안전하게 탈출이 가능하다는 맥락이다.
적어도 유리의 심장과 이 실험실 자체를 파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요한은 그 사실을 세상에 퍼뜨릴 역량을 갖춘 사람이기도 하다.
이 순간, 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 또한 잠잠하다.
류재관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강헌:모르겠어. 전부 괜찮은 것 같은데, 어느 하나 나은 게 없잖아.
여기서 당신만 안전히 내보내고 싶은 건 제 욕심이겠지요.
제가 말했었죠. 언제나 형의 의사를 물을 거라고요.
류재관:그러니 이제 당신의 의사를 묻겠습니다.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데, 둘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이 안전히 이곳에서 나갈 수 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다시는...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강헌:넌... 내가 그런 생각도 못하게 쐐기를 박았으니까.
그런 이상 혼자 하게 못 둬. 나도 꽂을게.
언제나 그렇듯이... 저도 형을 믿습니다.
이강헌:나도 너 믿어. 4년 동안 매일같이 믿었어.
이토록 어리고 아름다운 날들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 도대체 선택지가 맞단 말인가?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잘라 놓고 떠나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발짝 나아가는 게 다 무슨 의미인가?
기왕 가지고 태어난 힘을 더 나은 곳에 쓸 수 있게 최선을 다 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으려고 해요.
누가 동경 같은 걸 하라고 영웅 행세라도 했는가?
내가 이런 소리 했답시고 네가 당장 어디 날 고발할 수도 있고. 알아.
하지만 이강헌,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반동분자 같은’ 말 몇 마디 지껄였다고 학교에서 사라지는 것은 옳은 일이냐?
포르말린에 담긴 실험 표본 같은 꼴을 당하지 않았는가?
류재관이라고 해서 대단한 혁명 투사가 되려고 세상에 태어났겠는가?
그것을 추적하다 망명 정부에 투신했을 뿐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아무도!
이런 결말이 우리가 쌓아 온 선택의 결과라면 세상은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가?
세상을 구성하는 어떤 언어가 분명히 이렇게 말했었던 것 같다.
류재관:(벽에 기댄 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이는 이미 붉게 짓무른 눈가를 몇 번이나 닦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연한 부분의 천을 찢어내어 뭉친 다음 입에 물었다. 두 손으로 쥔 바늘의 끝을 심장에 조준한 뒤, 눈을 질끈 감았다.)
이강헌:(잘못될 수 있으니 만약을 대비해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 입을 달싹였으나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옅은 숨을 뱉으며 얼굴을 덮는 식은땀을 쓸어내려 닦는다. 체념하자 조급함이 밀려와 무작정 심장 위에 바늘을 가져다 댄다.)
끔찍한 통증과 함께 눈물 같은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눈 앞은 눈물일지 무엇인지 모를 것으로 흐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선뜩히 남아 가슴을 쾅쾅 두들겨 발기는 풍경이 있다.
세상에 찬란한 것들은 모두 그것의 모사품은 아니었을까 싶었던 때도 있었다.
만약 정말 당신에게 의지나 사고가 있어 누군가를 구원해줄 수 있었다면,
우리 시간은 왜 그날 그때로 고정되지 않았을까.
하나가 될 수도 없다면 우리 사이에 머무는 감정은 대체 사랑일까,
거센 소리가 나지 않게. 눈물처럼 품 안으로 번지는 온도가 있었다.
급기야 절절 끓는 불꽃이 되어 심장을 가르고 폭발하기 시작했다.
심장에 꽂힌 엄빌리컬 케이블에서부터 가장 뜨거운 불꽃이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지독하게 느리거나, 작거나, 너무나 연약하다.
죄와 같은 형상을 띤 케이블을 심장에서 잡아 뽑으면서,
저것이 ‘나’ 아닌 다른 어떤 자아일 수가 없다.
심장 위로 불타는 빛깔이 이렇게나 한 사람 것처럼 똑같은데?
달이 기어코 지구를 벗어날 수 없듯이 가까워진다.
세상은 오로지 두 사람의 인력을 구성하기 위해
46억 년의 세월을 버티고 여기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최 형...!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처럼 꿰뚫는 깨달음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삶은 다 어딘가 한 귀퉁이가 허물어져 비어 있었는데,
서로 마주 안으면 같은 방향에서 뛰는 맥박이,
이제는 속도와 횟수마저 맞추어 작게 쿵쿵거린다.
봉쇄된 통로가 다시 열리는데 그런 것쯤은 아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
아무튼 어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껴안는다.
이제 결코 헤어질 수가 없으리라는 게 느껴진다.
그가 숨쉬고 움직이며 감정을 느끼는 매 순간이 이토록 생생히 전달되는데
못 놔, 못 놓는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는데... 나는, 이미 형에게 각인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이제 형도 어디 못 간다고... 그 말을, ...그 말이 하고 싶었... 윽.
이강헌:...네가 나한테 못 간다고 할 처지야?
구실 생긴 건 나야, 너 두 번은 못 가게 할 수 있다고.
이제 진짜 어디 못 가. 모래 바람 날리는 곳으로도 못 뛰어갈걸? 가려고 해도 계속 뒤돌아보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류재관:이제, 형 없이는 안 가. 어디든... 지옥 끝자락이든, 폐허의 한가운데여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이제... 갑시다, 최 형.
이강헌:왜? 그냥 계속 반말하지... 나쁘지 않은데.
류재관:싫어. ...내가 남자로 보여야 형이 나를 연애 상대로 고려라도 해볼 거 아니야.
......아니.
말하지 마.
입 열지 마. 다 느껴지니까 제발 입 열지 마.
음, 아니다. 가자!
됐어. ...이미 다 망했어.
나가자.
네가 없는 밤에도 바람은 불고 꽃은 피고 다시 봄이 오겠지만,
그 말들이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완결이어야 하겠는가?
손을 잡고 지옥으로 가자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저들이 남기고 간 모든 불완전한 것들을 껴안고 떠나자고.
네가 없는 현실과 네가 있어 악몽인 무저갱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겠어.
이 순간 어려서 끔찍한 오늘과 참신할 것 없을 내일에 너를 홀로 두진 않겠어.
아무도 우리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기로,
우리는 그저 서로를 구원하여 카사블랑카를 벗어날 거야.
발목을 데우는 바닷물은 고요하고 우묵한 소음을 내면서,
마지막 틈새에서 황금의 에너지가 잉걸불처럼 뚝 떨어져 바닥을 구르다 잦아들었다.
류재관:
항법
기준치: |
99/49/19 |
굴림: |
44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강헌:
도깨비불 Roll
기준치: |
99/49/19 |
굴림: |
91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폭발적인 에너지의 파도가 실험실을 뒤덮고 모든 것을 파괴한다.
류재관의 에너지가 유리를 깨부수고 동시에 부드럽게 유리의 심장을 감싼다.
최가 자료를 모조리 챙기는 동안에도 사나운 에너지는 닥치는 대로 악의 잔재를 말살한다.
현무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태생적으로 악과 대적하므로,
그들의 에너지 또한 악과 업을 불태우고 점점 더 강해진다.
탈출 경로에는 경비 로봇이 3개 이상 등장한다.
하지만 호쾌한 손짓에 단숨에 로봇이 갈라진다.
두 사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마다 커다란 발톱 자국이 남는다.
이슬이 반짝이는 너테파도꽃은 은가루를 뿌려 녹인 보석처럼 흔들렸다.
방위사령부를 이렇게나 헤집고 나타났으니 당연히 위협사격과 추적이 있었다.
도시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시민들이 겁에 질려 기상했다.
류재관의 촘촘한 설계 위로 최의 불꽃너울이 가차없이 적을 섬멸한다.
이토록 너를 정전시킨 세계에 파도 같은 등불을 켜자.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이 도로 눈을 뜨는 순간이 오면,
이 끔찍한 나라가, 우리의 이기로 감전될 거야.
거기엔 계급도, 사회도, 이데올로기도 없을 거야.
우리가 머나먼 자오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후의 우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
네 목소리 하나하나가 그늘에도 얼비칠 것이 분명하니까.
누구도 이날의 사건을 무시하거나 묻어 버리지 못했다.
또다른 사라예보처럼 카사블랑카가 불안하게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2부,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끝.
3부, ‘적도편동풍을 타고 영원으로 가자’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