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머나먼 자오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후의 우주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그렇게 살아지자, 살아가자.
한낱 인간 따위는 너무도 손쉽게 잡아먹으려 드는 것 같을 정도로 무거운 배를 부풀린 채 거친 눈을 뜨고 있다.
18살 9월,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첫 달이 지나갔다.
각성자들은 학교에 적응하고 제 나름의 친분을 쌓아 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관학교라고 해도 결국 분류는 대학, 지식의 보고다.
과제 탓에 골몰하며 늦은 시간까지 도서실 불을 환히 밝히는 학생들,
저 장벽 너머에선 도무지 보기 어려운 녹음이 교정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상이 다 이곳 같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날이 좋아 하늘까지 맑았다.
카사블랑카의 시민들은 머리로나 알지 가슴으로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문득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반짝이며 알림을 울렸다.
오늘은 1학년 학생들이 두근거리며 기다리던 첫 가상 훈련이 있는 날이니 당연하다.
운동장 두 개 크기만큼 널찍한 홀로그램 단련실에서 특수 렌즈를 착용하면
바깥 사막과 동일한 환경을 구성해 둔 가상 VR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첫 한 달간 이론으로만 배운 전투를 어서 빨리 실전과 비슷한 공간에서 경험하고 싶다며 애가 닳은 학생도,
몹시 긴장하여 창백하게 질린 채 서 있는 학생도 있었다.
사실 학생들은 ‘자신과 맞는 구현자나 설계자가 누구일까’를 더 궁금해했다.
거기서 다시 15% 정도의 비율이 ‘각인’을 맺어 시너지를 내곤 한다.
보통 친한 친구끼리 무턱대고 함께했다 도리어 전투 방식이 맞지 않아 다치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1학년 때에는 하늘길 시스템이 신체 데이터를 통해
서로 보조해줄 수 있겠다고 판단한 후보 학생들과 여러 번 짝을 바꾸어 가며
누가 자신과 알맞는지 테스트를 해 보는 것이 관례였다.
: 자, 첫 번째 임시 페어 부른다. 설계 A반의 스즈키 와타루, 구현 E반 노노이 라가힛. 앞으로 서. 다음, 구현 B반의 시트라 볼크, 설계 D반 이한영…….
각자 자신의 임시 페어를 찾느라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최의 대외용 이름은 한참 기다린 후에야 불렸다.
: …구현 A반, 이강헌. 설계 D반, 류재관.
이강헌:내가 늦게 입학한 거지, 일 년 회춘한 게 아니라서!
그들이 바라보는 가상 환경과 전투 광경이 부속실의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친구들을 응원하면서 손에 땀을 쥐는 스포츠처럼 중계를 관람한다.
신체 부위마다 장착된 센서가 타격을 받으면 착용한 방어구가 고정되어,
실제 부상처럼 움직임을 차단해 해당 부위를 사용할 수 없게 되므로
이 훈련 안에서는 진짜 다친 것이나 다름없다.
몇몇 팀은 훌륭한 성과를 냈으나 대부분은 기본적인 타격 범위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제한 시간을 초과했다.
교수들도 채점 기준을 너그럽게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 모하에:저기, 지금 좌표 C4에서 총 쏘고 있는 애 이름이 뭐더라?
요한 에를리히:아까 말했잖아. 입학 체력평가 때 5등인가 했다던 애라고.
불쑥 뒤에서 말을 건 것은 학생회장 ‘유리 모하에’와 부회장 ‘요한 에를리히’.
3학년 생도들 중 우수한 학생들은 1학년 생도들의 멘토가 되어 졸업하기 전까지
2년간 상급생으로서 후배들을 이끌어 주는 제도가 있는데,
구현 A반과 설계 D반의 멘토가 바로 이 페어였다.
두 사람은 각 학년 수석 및 차석을 번갈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학기 첫 주에 유리가 구현자, 요한이 설계자라는 소개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대추야자를 집어먹고 있던 유리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유리 모하에:쫄지 마! 몇 번 하다 보면 이제 지루하고 졸려서 빨리 실전이나 하고 싶다고 빌게 될 걸.
한편 요한은 혀를 차곤 안경을 밀어 올리며 스크린에 집중했다.
‘입학 체력평가 때 5등인가를 했다던’ 동급생이 화면 안에서 정확한 사격 실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능력이 총과 관련된 학생이었던 것이 얼핏 떠오른다.
곁에서 그의 페어가 소리를 지르는 게 스피커를 통해 울렸다.
: 좀 더 위로 경로를 끌어올릴 테니, 한 번에 쏘아 터뜨려! 마지막 한 방이다 생각하고 해치우자고!
곧이어 설계자 쪽이 설계한 경로를 따라 미로를 뚫고 지나가듯 구현자의 총알이 궤적을 바꾸었다.
허공에서 몇 갈래로 갈라진 총알 파편이 굉장한 소리를 내며 크리쳐형 로봇의 머리를 터뜨렸다.
유리 모하에:어때? 저 두 사람은 합이 꽤 잘 맞는 것 같지?
여기 둘은 서로 인사 나눴어?
속 시원한 타격감을 따라 박수를 치던 유리가 최와 류재관을 돌아보았다.
류재관:...저희는 동향이라, 원래 알던 사이입니다.
이강헌:몇 년 됐었지? 여하튼 낯익다 못해 썩은 지경이다~ 이거죠.
류재관:......벌써 십 년도 더 넘었습니다. 제가 형을 처음 본 게 여덟 살 때이니.
유리 모하에:아~ 어쩐지! 너희 둘은 별로 어색한 티도 안 나더라.
짧은 대화를 나누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두 사람의 순서가 되었다.
보급받은 특수 렌즈와 방어구를 착용하자 몸이 다소 무거워졌다.
유리와 요한은 통신 인이어를 끼면서 조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유리 모하에:자, 절대 긴장하지 말고. 굉장히 현실적이지만 실상은 그냥 거대한 훈련실이란 걸 잊지 마.
요한 에를리히:그렇다고 실전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임해서도 안 된다.
그런 감각에 익숙해지면 장벽 너머로 나아가 진짜 적을 맞닥뜨려도 그 상황을 모의 훈련이나 게임처럼 느껴 버리고 마니까.
유리 모하에:우리가 앞뒤에서 너희를 엄호해 줄 거고, 진짜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곧바로 시계 옆 S버튼을 연달아 세 번 눌러.
다들 알겠지만 원래 이 버튼 세 번 신호는 실제 위급상황에서 연락처에 등록된 비상번호 쪽으로 연락을 보내는 시스템인데, 이 훈련실 범위에 한정해 그 비상신호가 관리 교수님들께 도달하도록 시스템이 변경되어 있어.
게다가 저기 스크린으로 모두 보고 있을 테니까. 알았지?
주의사항을 몇 가지 더 들은 후에야 훈련실 입실이 재가되었다.
네 사람이 모두 입실하고 마침내 문이 닫히자,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는 모래바람이 불었다.
근래의 방독 마스크는 기능이 좋아 쓴 것 같지도 않게끔 호흡하게 해준다지만 이런 기후 속에서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한 차례 먼지 폭풍이 가셨을 때 비로소 풍경이 보였다.
‘재앙의 날’을 기점으로 인류가 유사 이래 이룩한 빛나는 문명은 전부 사토 속에 묻혔다.
첫 몇 년간은 식물들조차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해 말라 죽어갔던 고로
당대에 흔히들 ‘인류가 멸망하면 몇 년 안에 건물 벽면을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라고 상상하던 광경조차 제대로 전개되지 않았었다고 한다.
가동을 중단한 원자력 발전소가 비상 전력마저 잃고
인간이 직조한 가장 큰 멸망을 세상에 내보내려 했을 무렵에는
갓 개화한 각성자들이 그 위기를 막아 처음으로 인류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찬란했던 문명에 바치는 추모비처럼 모래 속에 묻혀 쓸쓸히 늙어 가는 빌딩숲,
그리고 멀리 가장 거친 먹으로 그려낸 듯이 일렁이는 바다.
장엄한 자연의 비난을 처음 보는 1학년들은 말을 잃기 마련이다.
이 광경에 익숙한 멘토들이 앞장서 홀로그램 패널을 띄웠다.
요한 에를리히:이 공간은 카사블랑카 북동쪽 게이트 바깥 구역과 일치하는 구조로 생성된 거야.
설계자들은 각자 지도에서 목적지까지의 최단 경로를 표시해 봐.
류재관:
항법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15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요한이 올바른 경로가 표시되었는지 재차 체크했다.
이제 네 사람은 이 경로를 믿고 목적지까지 움직이면서 하나 이상의 크리쳐 로봇을 파괴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진 조언은 엄폐물과 환경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낡아 가는 건축물들을 이용해 몸을 숨기고 접근했다가,
설계자의 경로 구현에 에너지를 실어 구현자가 한 방을 터뜨리는 것이 기초적인 전투 방식이라고 했다.
넷은 가장 가까운 폐건물 옥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유리는 최에게 단추 정도 크기의 정찰 드론을 건네 준다.
유리 모하에:이걸 바깥으로 던질 건데, 너네가 할 거야.
서쪽으로 30m 정도 위치에 크리쳐 로봇이 있어.
설계자는 왼쪽 창문으로 거리를 가늠하고 에너지 흐름을 느껴.
구현자는 이 드론에 네 에너지를 실어서 던지는데, 설계자의 경로에 얹어서 실어 보낸다는 느낌으로 해야 해.
나중에 익숙해지면 이런 드론 같은 유도장치 없이도 두 사람의 에너지 운용이 손쉽게 합쳐지는 거지.
자, 해 봐! 무서워하지 말고.
구현자는 정찰 드론을 던지면서 본인의 이능력과 관련된 핵심 기능 판정을,
이강헌:
도깨비불 Roll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5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류재관:
항법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1 |
| 판정결과: |
실패 |
공중에 투명하게 고여 있던 에너지가 희미한 진홍색으로 일렁이며 물들고,
제멋대로 엉겼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에너지 흐름이 점차 정렬되어 미로 지도 같은 꼴을 이루었다.
그러나 복잡하게 엉킨 에너지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경로를 찾기가 힘들었다.
미끄러지듯 창문 밖으로 던져진 드론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추락해 폭파되었다.
유리 모하에:처음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지. 괜찮아 괜찮아!
유리는 빙그레 웃으며 격려와 함께 드론을 재지급해주었다.
이강헌:그거 긴장해서 그래. 연습했으니까 다시 하자!
이강헌:
도깨비불 Roll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99 |
| 판정결과: |
실패 |
도깨비불 Roll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4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류재관:
항법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74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전신의 감각이 단번에 확장되고, 시야가 환하게 트였다.
공중에 투명하게 고여 있던 에너지가 희미한 푸른색으로 일렁이며 물들고,
제멋대로 엉겼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던 에너지 흐름이 점차 정렬되어 미로 지도 같은 꼴을 이루었다.
방향은 서쪽으로 30m, 설계자는 에너지의 흐름을 가지런히 한 가닥으로 이어 뽑아 경로를 설정한다.
구현자가 그 경로 위에 제 힘을 실어 드론을 날려 보냈다.
미끄러지듯 경로를 타고 바깥을 떠가던 드론은 이내 적절한 길을 찾아 크리쳐 로봇에게로 향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론은 네 사람의 홀로그램 패널에 30m 너머의 크리쳐 로봇을 비춰 주었다.
미끌거리는 피부, 구역질나는 주둥이 속에서 긴 송곳니 두 개가 번쩍이는 크리쳐가 그르릉거리고 있었다.
류재관:
SAN Roll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93 |
| 판정결과: |
실패 |
3
이강헌:
SAN Roll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84 |
| 판정결과: |
실패 |
3
유리의 지휘 하에 이능력 타입에 따라 2:1 전투를 전개한다.
폐건물에서 원거리 전투를 벌여도 좋고, 뛰어내려 근접전을 벌여도 좋다.
이강헌:난 가까워야 더 잘 싸워지더라. 도깨비불도 그렇대.
크리쳐 로봇:
물어뜯기
| 기준치: |
25/12/5 |
| 굴림: |
40 |
| 판정결과: |
실패 |
| 피해: |
3 |
이강헌:
도깨비불 Roll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5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류재관:
유리손포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33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3 |
크리쳐 로봇:
물어뜯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5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1 |
이강헌:
도깨비불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42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1 |
이강헌:
도깨비불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15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 피해: |
1 |
류재관:
유리손포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13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 피해: |
2 |
크리쳐 로봇:
물어뜯기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16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2 |
이강헌:
도깨비불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41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4 |
이강헌:
도깨비불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4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피해: |
2 |
류재관:
유리손포
| 기준치: |
90/45/18 |
| 굴림: |
6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피해: |
4 |
유리의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의 협력 수준이 아주 좋아 평균보다 빠르게 크리쳐를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야 너희! 최초 동조율이 60% 이상이던데? 진짜 높은 수치잖아?
이강헌:오, 처음에 실수한 것 치고는 꽤 잘 나왔는데?
류재관:한 번 실수한 걸로 이리 계속 놀리실 겁니까?
이강헌:재밌잖아! 이때 안 놀리면 언제 놀릴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다, 반파된 크리쳐를 바라보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이강헌:
관찰력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1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저것은 어떤 길짐승도, 어떤 날짐승도 닮지 않았다.
……방사능 탓에 변이된 동식물이라기엔 조금 이상하지 않나?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념에 잠겨 있던 때,
동쪽 모래 폭풍 너머로 멀리 거대하게 솟은 첨탑이 어른거렸다.
이강헌:
관찰력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5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상단부에 발린 청록색 염료가 누렇게 바랬고, 아름다운 문양이 둘러쳐져 있다.
현무국은 문화재의 가치를 높이 따지는 곳이었으므로, 그러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온 최는 덧붙여 떠올린다.
저 모스크가 ‘재앙의 날’ 이전 이 땅을 지배했던 모로코 왕국에서 건설한 ‘하산 2세 사원’의 모스크라는 것을.
침묵 어린 시선으로 그것을 함께 바라보던 유리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눈치인데, 유리는 다른 것을 의식하는 모양이다.
첫 가상 훈련이 종료되고 학교는 잠시간 그 화제로 시끄러웠다.
자신이 크리쳐 로봇을 얼마나 멋지게 부수었는지 떠들어 댔다.
저런 흥분도 반복된 훈련을 거치고 나면 결국 사그라든다는 것을 아는 멘토들만 쓴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토요일, 학생들은 간만에 찾아온 휴식을 누리고 있었다.
이강헌:아이고, 졸려 죽겠네... (이불 대충 밀어 두고 일어나 창문으로 바깥 살핀다.)
그때, 방문을 열고 동급생이 굴러 들어오듯 뛰어 왔다.
갑작스레 들어와 ‘너는 아니지’ 하고 묻는다고 해도, 뭐가 아니냐는 말인가.
동급생:지금 인자 다 뒤집어졌어! 아직 안 봤어?!
최가 스마트워치를 통해 인자미나에 접속하면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을 볼 수 있다.
동급생에게 이게 무슨 일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강헌:아니, 뭔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이래? 모처럼 휴일에도?
이것도 봐!
…그러니까, 글의 요지는 ‘정부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사실 스와콥문트에는 뭔가 조작된 구석이 있다’는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얼마 전 류재관의 어머니가 스와콥문트로 이사했다는 사실도 떠올릴 수 있다.
동급생:나 새벽부터 잠 안 와서 계속 새로고침 하고 있었는데 야, 글이 진짜 네 번을 올라왔다니까?
그러다 세 번째 글 삭제됐을 때 인자미나 서버가 잠깐 터졌거든? 그 뒤로 저 네 번째 글이 오늘 동 튼 직후에 올라왔는데 이상하게 저 글은 삭제가 안 돼.
코딩동아리 애들이 그러는데 사이트 자체를 해킹해서 글 작성한 아이디를 특수 등급으로 빼둔 게 아니냐고 하더라고. 관리자 권한이 있어도 글 삭제가 안 되게.
그러고선 주변 눈치를 본 동급생이 귀에 속삭였다.
동급생:왜, 이런 반동분자 같은 글은 애초에 AI가 맥락을 검열해서 작성 자체가 안 되잖아.
글쓴 애도 시스템을 뚫을 줄 아는 녀석이 아니냐는 거지. 서버나 해킹, 계산 관련 이능력 가진 애들 아침부터 다 불려갔어.
그제야 기숙사가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게 느껴진다.
정부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시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겠으나
그렇다고 하루 종일 기숙사방에만 처박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에서 과제용 책을 빌려야 한다. 빨리 가지 않으면 없을 것이다.
이강헌:일단 알겠는데, 아마도 곧 내 동아줄이 끊어져서 지금 빨리 가봐야 될 것 같거든? 나중에 또 뭐 있으면 알려줘야 된다? 나 좀 다녀올게!
각성자사관학교의 도서관은 카사블랑카에서도 독보적으로 장서 수가 많아 유명하다.
다가온 중간고사 때문에 대부분 공부에 몰입해 있지만,
서가와 서가 사이에서 두 학생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 …그러니까, 몬로비아에서 시신 발견됐다는 거 구라 아니라니까. 아놀드 박사가 우리 사촌언니 담당교수였잖아.
아무래도 아까 그 게시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대인 기능 판정을 통해 대화에 끼어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이강헌:
듣기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28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 아놀드 박사가 화학자인 건 알지?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낸 공로가 있잖아. 그래서 스와콥문트 시민권도 획득했고.
그래서 자기 제자한테 자기 연구 자료를 전부 넘기고 조용한 은퇴 생활을 즐긴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 최근에는 SNS를 통해 요리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는 근황도 올렸으니까?
연구실 제자들 중에서 두어 사람이 아놀드 박사랑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는대. 화상이나 음성 통화도 했다는데... 언니 말로는 뭔가 이상하다나. 연구 제자와 아놀드 박사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 당연히 알아야 하는 주제에 대해서도 의례적인 답변만 돌아오거나, 연구 주제에 관해 질문해도 정확한 대답을 못 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대.
: ...화상 통화나 음성 통화 모두 조작 가능한 세상이잖아. AI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
이미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꾸며내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어.
어딘가 마음을 불편케 하는 대화를 듣던 최가 드디어 찾던 책을 발견했다.
그럼 이제 학생회관으로 가볼까? 그곳 2층에는 자습실이 있다.
이강헌:하... 역시, 동아줄 끊어지려면 아직 멀었다! 귀동냥 정보통도 아직 안 죽었네. (책 들고 자습실로 향한다.)
자습실로 들어서려던 최는 복도 끝 학생회실에서 누군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듣는다.
요한 에를리히:입 좀 다물어, 밖에 다 들려!
뭣 때문에 저렇게 싸우는지 몰래 엿들어도 좋지만,
요한이 말린 탓에 간신히 크기를 줄인 유리의 목소리는 엿듣는다고 해도 잘 들리지 않는다.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도 목소리를 더 낮추는 게 좋겠다는 경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
최가 자연스럽게 학생회실로 접근하여 두 사람의 동태를 살피면
가까이 가 보니 방음설계가 되어 있는지 대강 서로 탓하는 것만 얼핏 알 수 있고 정확한 내용은 도통 파악이 안 된다.
듣기 판정을 시도할 수 있지만, 어려운 성공 이상만 결과를 들을 수 있다.
이강헌:
듣기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23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유리 모하에:애들은 모르잖아! 우리가
모니터링한다는 거!
최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갑작스레 학생회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 유리를 마주하게 된다.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던 유리는 최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성큼성큼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다.
열린 문 안에서 한숨을 쉬던 요한은 잠시 후 학생회실을 나오고, 최와 마주친다.
...다 들렸나?
이강헌:음, 여기서 싸웁니다~ 하는 정도만 들렸어요.
요한 에를리히:하... 그놈 목소리가 기차 화통 삶아먹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아.
요한은 다시 ‘내가 늙는다’는 얼굴을 한 채 한숨을 푹 쉰다.
요한 에를리히:이거, 유리가 두고 갔다. 내가 가면 또 화낼 테니 네가 좀 전해줘. 아마 학관 뒤뜰 정원에 있을 거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만, 이상한 점은 그게 아니다.
현대에 이르러 방수 기능까지 완벽해진 스마트워치는
정말 특이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풀지 않고 늘 착용하는 기기다.
이강헌:어쩌다 두고 갔길래요? 도통 풀 일이 없던데...
요한 에를리히:......넌 몰라도 된다. 얼른 뒤뜰이나 가 봐.
대기오염 탓에 담배는 굉장히 규제가 심한 기호품이었다.
한 갑에 네 시간어치 시급을 털어 넣어야 하는 그것을 유일하게 좀 저렴히 구입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각성자들이었다.
세상이 한 차례 멸망했어도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보급품은 담배와 초콜릿인 모양이다.
유리는 깜짝 놀라 담배를 눌러 끄고 냄새를 탈탈 턴 후에야 멀찍이 서서 대화한다.
이강헌:에이, 안 끄셔도 되는데! 타는 냄새가 다 거기서 거기죠, 뭐.
유리 모하에:손에 들고 있는 거 내 스마트워치 맞지? 고맙다, 야.
......요한 많이 화 났냐?
이강헌:그것보다는 선배님 생각해서 절 보내시던데요? 본인이 직접 가면 더 화낼 것 같다, 대충 그러셨는데!
유리 모하에:그래? 나도 마음이 안 좋아서. 담배 말고는 마음 달랠 길이 없어. 요한은 이것도 끊으라고 성화라니까.
이강헌:보통 그럴 때 잘~ 구슬려야 며칠은 말 없이 지나가는 법! 이거 진짜 효과 있어요. ...나름?
유리 모하에:그러냐? ...좋아! 다음엔 시도해볼게.
아, 음... 너 말이야. 아까 기숙사 방에서 인자미나랑 커뮤니티에 대해 이야기 했었지?
이강헌:오, 대박. 다들 하는 거라서 그런가, 계속 얘기하더라고요.
유리 모하에:맞아. 그래도 너는 재주 좋게 동아줄 운운하면서 그 얘기에서 잘 빠져나가던데?
이강헌:이야~ 어디까지 들으셨대? 저 몸에서 막 소름이... 어우.
유리 모하에:...하하,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유리는 호쾌한 성격답지 않게 한참이나 숙고했다.
검지를 입가에 가져가 ‘쉿’ 제스쳐를 취한 그는
손목의 스마트워치를 가리키고선 푸는 시늉을 해 보였다.
유리가 옆면의 S버튼을 묘한 박자에 맞추어 여러 번 눌렀다.
갑작스레 홀로그램 패널이 켜지더니 초록색 안내창을 내보냈다.
유리 모하에:이 학교엔 듣는 귀가 많아. …그런 주제는 조심하는 게 좋아.
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워치가 학생들의 대화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강헌:...학생들은 보통 이런 기능 모르지 않나요?
유리 모하에:모르지. 나는 학생회 소속 중에서도 임원이니까 아는 거야.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도청되고, 그 기록은 학생회실 서버에 쌓여.
우리 같은 임원들만 접근 가능한 정보지만, 대화 중 특이한 단어가 수집 되잖아? 그럼 정부로 보고가 들어가곤 해.
나는 이 수집에 반대하지만 당장 학생회장으로서 이런 도청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이 없어.
네게 위험한 사실을 말해 주는 까닭은... 아직 학교 규정을 잘 모르는 네가 혹여나 검열 기준에 어긋나는 대화에 끼어 큰일을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 되기 때문이야.
음성 수집 기능을 잠시 꺼 두는 건 그것대로 기록이 남지만, 이 기록은 내가 지울 수 있으니 몰래 지워 주려고 해. 앞으론 조심해.
이강헌:아하, 그럼 여태 사생활이 없었단 거네요? 이번에 입학해서 다행인가? 으하하핫! 최대한 피해 보겠습니다~
유리 모하에:그래, 시원시원해서 좋다! 너 좀 마음에 드네?
시원스레 웃으며 최의 어깨를 두드리던 그가 이윽고 조금 씁쓸한 듯 웃습니다.
유리 모하에:……바보 같은 일일 수도 있지. 내가 이런 소리 했답시고 네가 당장 어디 날 고발할 수도 있고. 알아.
하지만 강헌아,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이 ‘반동분자 같은’ 말 몇 마디 지껄였다고 학교에서 사라지는 것은 옳은 일이냐?
나는 오래 전에 이미 한 번 친구를 잃었고, 같은 일을 다시 겪고 싶진 않아서 학생회장이 됐어. 멘토 자리도 그래서 자원한 거고.
어린 나이에 각성했고, 부모는 국가기관 연구소에서 일하는 ‘출신성분 확실한’ 가정의 외동딸.
별달리 억압당한 가족도, 잃어버리거나 빼앗긴 재산도 없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1학년부터 학생회에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설파하기에 그의 삶은 다소 유복하다.
유리 모하에:…간다. 음성인식 다시 켜려면 S버튼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 다시 길게 세 번 누르면 돼.
오늘 기록은 내가 한꺼번에 지워줄 테니 자유를 좀 더 누리든가.
뭐라고 더 말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유리는 고개를 내젓고 최의 등을 두드려준 후 자리를 떠났다.
...아, 맞다. 과제!
이번에야말로 정말 자습실로 돌아가려던 그 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침울한 표정의 그가 최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선다.
이강헌:뭐야,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류재관:...학우들 사이에서 스와콥문트에 관한 글이 돌고 있던데, 형도 보셨습니까?
이강헌:아, 그거. ...음, 어머니한테 연락 온 건 없고?
그런데, 어쩐지 위화감이 듭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미트볼 스파게티 레시피를 가르쳐 달라 했더니 파르미지아노 치즈를 뿌려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항상 체다치즈를 넣으시던 분이셨는데 말입니다.
이강헌:내가 듣기로는, 거기 간 이후로 사람들이 이상해졌다는 게 전례 없는 게 아니라 허다한 수준인 것 같은데...
류재관:그렇습니까? 혹여나 거기서 이상한 세뇌라도 받고 있다거나, 기억이 조작되는....
.......
어머니가... 그곳으로 가시기 전에 어떤 잡지에 기고문을 보내셨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논조였고요. 그리고 그 잡지는 다음 해에 폐간 되었습니다.
어쩐지 불안합니다. 건강히 계신 건지도 모르겠고, 저로서는 그곳으로 갈 방도가......
갑자기 두 사람의 스마트워치에 긴 진동이 느껴졌다.
서사의 판면을 강제로 집어 벌리고 삽입되는 개정 기호처럼
홀로그램 패널은 동의도 없이 방송 창을 띄웠다.
화면 너머에는 각성자사관학교의 학장이 무게감 있는 시선으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안이 중대해 전체방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새벽 익명 커뮤니티 ‘인자미나’에 게시된 글의 작성 IP가 교내인 것으로 추적되었습니다.
교수진은 불온한 선동 여론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우리 학생 혹은 교원의 손에서 빚어졌다는 사실에 지극한 유감을 표합니다.
학생 여러분께선 헛된 소문에 경도되지 말고 우리 빛나는 오십 년 사학을 지킬 수 있도록 학업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각성자사관학교는 당 사안을 좌시하지 않고 엄중히…….
정말 헛된 소문이라면 이렇게 대응하는 것보다야 무시하는 것이 일을 덜 키우는 방식이리라.
행간에서 윗선의 압력이 있었음을 읽을 수 있는 연설이었다.
지리한 말들이 이어진 후 학장은 벌떡 일어서 허공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이제 학장의 얼굴 대신 아프리카 연합공화국의 국기가 송출되고 있었다.
발자국 거친 사막으로부터 인간의 도약 다시 시작되리
조국은 참되어 거짓을 모르니 아프리카여, 영혼의 요람 되어 새 외침을 빚으라
물수리 나는 창공과 천 년의 녹음 우거진 여름 돌아올 때까지
마땅히 이 자리에서 각자의 구원을 위해 힘쓰겠노라
삶과 죽음은 한 선으로 가로놓여 있어, 동일한 권리 나누어 받은 시민들이여
여기 화합과 희망의 상징, 위대한 화음이 있으니
이 땅의 더 나은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로 넘기자
국가 "신이여, 아프리카를 굽어보소서"가 작사될 때에
이슬람 교도들과 기독교도들이 조사 하나까지 좀 더 서로의 종교에 알맞은 색깔을 담으려 다투는 광경을 보고,
유럽과 아시아의 ‘선진국’에서 건너온 초기 공화국 시민들은 퍽 당황했다고들 한다.
그들이 생각하기로 아무튼 아프리카의 종교라고 하면 젬베를 두드리며 토착신을 찾는 종류였지
지극히 ‘문명화된’ 메이저 종교를 믿을 리는 없었으니까.
이 무례하고 순진한 오해를 지닌 산부의 산도를 열고
새로운 공화국이 마침내 세상에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정부는 좀 예민하다 싶을 만큼 ‘화합’을 강조했다.
출신도 문화도 다른 사람들이 재난 때문에 섞여 살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교정에, 회사에, 길거리에, 카페에, 펍에 국가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당장 하던 일을 멈추고 어디에나 설치된 공화국 국기를 향해 경례해야 한다.
그것조차 여의치 않을 땐 하늘길 시계가 국가를 자동 인식하여 홀로그램 패널로 국기 이미지를 띄워 준다.
검은 상단은 여러 국가를 뿌리로 둔 시민들이 화합되어야 할 아프리카 연합공화국의 대표색상 역시
흰 하단은 이 땅이 흐트러지기 전부터 오래 자리를 지켜 온
아프리카 대륙의 사막을 오염 이전으로 돌려놓겠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태양 안의 붉은 별 일곱 개가 일곱 도시를 나타낸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어린이들은 국부로 추숭되는 초대 대통령의 위인전을 읽으며 자라나고,
‘모든 사람은 동일한 권리를 타고난다’고 교육받으며,
험지를 헤치고 인간의 위대한 문명을 다시 이룩한 조국에 충성을 바치라는 가르침을 듣는다.
학교는 고요하여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 빈 방을 모두 채우라는 요구에 초를 사와 불을 밝혔다던 처녀의 일화처럼
이 광막한 공간에는 오로지 경건하고 엄숙한 국가 선율만이 가득했다.
바람이 널리 드나들 수 있도록 지은 1층 회랑은 카사블랑카의 자부심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제 그런 통기성 좋은 건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진 시대였기 때문이다.
때로 함신은 굳건한 도시 장벽 너머로부터 날아와 외벽을 덮어 버리곤 했다.
그러나 비공식적 별명으로 ‘제1도시’ 라는 명칭을 가진 카사블랑카의 장벽만은,
공화국 시민들을 불편케 하는 모든 재난으로부터 사람을 지킨다.
따사로운 햇살과 축복 같은 적도편동풍이 뺨을 어루만지든 어쩌든,
학생들에게는 불행했던 중간고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군사전략 입문>, <전략문화와 전쟁>이었다.
<전략문화와 전쟁> 중간고사 시험 대체 조별 과제 에세이는
첫 가상 훈련 때 맺어졌던 페어끼리 함께 작성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리델하트의 『전략론』을 통해 독일이 독소전쟁에서 패배한 사유를 분석하라.」
…1학년이 당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본래 <전략문화와 전쟁> 강의 평가는 늘 심한 호불호 영역에 놓여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머리를 너무 쥐어뜯은 탓에
그걸 다 치워야 하는 근로장학생들의 스트레스도 갈수록 쌓여 갔다.
최와 류재관은 도서관 구석 창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여러 자료를 읽어 내려가는 중이었다.
긴긴 고난 끝에 레포트는 결론 부분에 다다랐다.
이강헌:내 머리는 이미 많이 빠진 것 같아......
류재관:그러니 그만 좀 쥐어 뜯으십... 또, 또! 손 내리십시오!
이강헌:야야, 도서관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면 어떡해? 사람 잡는다고 소문 다 낸다?
류재관:윽, ...이쪽이나 마저 쓰십시오. 이 부분의 참고 문헌은 형이 보셨잖습니까.
이강헌:거긴 좀 더 뜯어야 나올 것 같아...
류재관:이럴 거면 제가 직접 뜯는 게 낫겠습니다.
이리 와 보십쇼.
이강헌:너 원래 딱밤도 혼자 때리면 안 아픈 거 몰라? 이것도 남이 뜯으면 더럽게 아프다고!
근처 자리에서 골머리를 썩던 동급생이 다가와 류재관에게 말을 건다.
: 재관아, 30분 남았어. 우리 슬슬 준비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최의 머리칼을 쥐고 있던 류재관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아귀의 힘을 푼다.
남은 시험 중 다른 강의인 <군사전략 입문> 가상 훈련에서
류재관과 또다른 임시 페어를 맺고 있는 노노이 라가힛이었다.
류재관:...형, 마무리만 부탁합니다. 저 다녀오겠습니다.
이강헌:아오, 아파... 누가 뜯어서 완성은 잘 되겠다. 열심히 해 둘게... 최대한?
그가 자리를 뜨면, 곧 그 뒤에서 유리가 나타난다.
유리 모하에:야, 이거 <전략문화와 전쟁> 레포트지? 그 끔찍한 거? 어떻게 매해 이렇게 참신하게 엿을 먹이시냐.
이강헌:들은 이상 까라면 까고 쓰라면 써야죠... 엿도 먹으라 하면 먹어야 하는데.
유리 모하에:보기보다 열심히 사는 청년이구만... 좋아, 이 멋진 멘토가 선심 쓴다!
유리는 근처 서가에서 책을 한 권 뽑아 오더니 류재관이 있던 자리에 앉았다.
…전쟁이란 냉병기를 쥔 영웅들이 대강 ‘와아아’ 하고 몰려왔다가
단신으로는 보일 수 없는 무위로 세상을 휩쓸어
‘그리하여 여기서 역사의 지도는 변곡점을 맞았다’ 따위로 묘사되는 일이 아니다.
레마르크의 ‘이 책은 고발도 아니고 또 고백도 아니다.
비록 포탄은 피했다 할지라도 역시 전쟁에 의해서 파괴된 어느 시대를 보고하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문장이
저 사막의 신체를 입은 재앙 속에서도 온전히 남아 우리 세대로 전해진 사실을 감사히 여겨야 한다.
<전략문화와 전쟁> 담당교수가 집필한 도서가 분명했다.
그 교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전쟁의 비극과 날것 같은 참호전의 참상을 묘사하는 습관이 있었다.
유리 모하에:그 교수님, 자기 책 인용하면 되게 좋아해. 이런 거 참고해서 써봐. 어디까지 썼냐?
이강헌:어찌어찌 결론까지는 왔는데, 결론이 안 나서 도무지 완성이 안 된다니까요?
유리 모하에:이야~ 벌써 결론까지 갔어? 역시 신입생의 패기는 남다르네.
그럼 결론 쓸 때 더더욱 참고하면 좋겠다. 그 교수님이 이 책 마지막에 얼마나 열변을 토해 놓으셨는지... 분명 활자를 읽고 있는 건데 귀에서 피나는 줄 알았어.
이강헌:그만큼 열정적인 문장이면 넣는 게 득이 더 많을 테니까 나쁘지 않은데요? 읽으면서 혼나는 기분 느끼고 싶진 않긴 하지만...
유리 모하에:책으로 혼나는 게 나아. 레포트 망치면 무시무시한 불호령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너는 내 꼴 나지 말고. ...나야 요한이 도와주지만!
아, 그러고 보니까 네 페어는? 원래 둘이 붙어다니지 않았어?
이강헌:아, 재관이는 다른 임시 페어랑 할 일이 있어 보여서 잠깐 보냈어요.
유리 모하에:아... 이름이 류재관이었지, 참. 걔가 정말 특이한 체질이긴 하더라.
이강헌:걔가 좀 특이하긴 해요~ 아마 상상 이상으로 더 특이할 걸요?
이강헌:뭐라고 하지? 살짝, 얌전이랑은 다른... 무슨 느낌인지 아시죠?
유리 모하에:알 것 같기도 하고. 요한도 평판은 좋거든....
아 아니 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특이 체질이라는 건 다른 얘기였어. 평균적으로 첫 임시 페어와의 동조율이 50%만 넘어가도 정식 페어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치거든?
페어들은 보통 이것보다 낮은 동조율로 시작해 합을 맞출수록 동조율이 상승하곤 하니까.
너희는 시작부터 60%를 넘어섰으니....
그런데 그게 류재관 걔가 선천적으로 에너지 감응도가 높은 편이라 그런 것 같더라고.
유리 모하에:걔 다른 임시 페어가 라가힛인가, 걔랑도 꽤 높게 나왔어. 물론 다른 애랑도.
그러니 그 애를 놓치면 되게 아까운 일이라는 말!
이강헌:아마 놓칠 일 없을 겁니다~ 걔가 저랑 붙은 데에는 다~ 믿지 못할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요. 으하하핫!
아마 놓아도 지 혼자 안 떨어지는 애라서, 별 걱정 없기도 하고요.
유리 모하에:그렇게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나도 뭐라 반박할 말이 없네... 그래! 나도 응원할게. 너희 보면 나랑 요한 신입생 시절 같다니까.
도서관 내 정숙이라는 예절도 신경 쓰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누군지 보기도 전에 최는 팔을 잡아채여 일으켜 세워졌다.
: 이강헌! 너 가상훈련 때 류재관이랑 임시 페어 맺었던 애 맞지.
빨리 와! 설계 반동 터졌어!
이강헌:어어? 지금? 재관이는 미리 가 있어?
유리 모하에:얼른 따라와! 설계 반동이면 제2의무실로 실려 갔을 거야!
의무실 바깥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상황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위로 검붉은색 에너지가 얹혀 피처럼 뚝뚝 흘렀다.
의료진 두 사람이 발작하는 류재관을 억누르고 약을 주사하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를 지경이고, 식은땀이 침대보를 적시고 있었다.
유리가 침대 곁으로 달려가 의료진까지 제치고 화면에 표시되는 에너지 파동을 읽었다.
유리 모하에:안정도가 엉망이야! 선생님, 약물로 해결이 안 되는 수준인가요?
의사: 반동이 너무 심하게…… 같이 시험 치르던 학생이 심하게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류재관의 페어는 노노이 라가힛, ‘입학 시험 때 5등인가 했다던’ 그 동기.
정확히는 정체 모를 검붉은색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서.
유리 모하에:당장은 방법이 하나뿐인 것 같다.
설계 반동이 이 정도로 왔으면 너라도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이러다 얘 죽어!
의사: 아니, 유리 학생. 설계 반동이 위험하긴 해도 죽는 정도까지는…….
무슨 확신이라도 있는지 고함을 지른 유리가 올올히 일어서 불타는 눈으로 최를 쏘아보았다.
유리 모하에:......이거 에너지 주입 정도로는 안될 것 같아.
언약해.
너희 둘, 정식 페어 맺으라고.
유리 모하에:정식 페어가 된 순간 에너지 유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니, 날뛰는 각성자를 안정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야.
어쩔래?
...해요, 할게요! 안 하면 더 위험한 건데 뭐가 좋다고!
유리 모하에:그래, 다행이야. 나중에 페어 언약을 푸는 수단도 있으니까 혹시라도 마음 바뀌면 말해. 당장은... 사람부터 살리자.
유리가 의료진을 이끌고 의무실 바깥으로 나간다.
‘페어 언약’ 절차시엔 근처에 다른 각성자가 있어서는 안 됐다.
류재관을 달래거나 독려하여 안정시키고 페어 언약을 시도하게끔 한다.
이강헌:재관아, 내 목소리 들리지? 너 할 수 있겠어? 경로만 어떻게 해 봐, 응?
류재관:형, 나...... 아파, 아프... 읍. ...어떻, 어떻게 하면 되는, 데요.
구현자는 본인의 이능력과 관련된 핵심 기능 판정을,
이강헌:
도깨비불 Roll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1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류재관:
항법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63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간난신고 끝에 뜨겁고 전류 같은 에너지가 심장까지 메다 꽂혔다.
일견 자해와 비슷하다는 기분이 들 만큼 무자비한 방식의 지배였다.
녹은 금속처럼 무섭도록 달아오르는 두 사람의 체온,
판정과 글줄로 이루어진 우주에 오로지 둘만이 온전한 것처럼.
잠시 후, 자연스레 피어오른 에너지가 황금색 빛을 뿌리며 허공을 맴돌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 눈물이 맺힌 류재관의 시선이 최를 본다.
이전까지 되지 않던 것이 지금 이 순간부터는 수월하게 가능할 것 같다.
류재관이 아주 멀어지더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류재관은 힘겹게 숨을 쉬고 있다.
반동으로 인해 고갈된 에너지가 도로 채워 지질 않으니 추위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접촉으로 건네주는 에너지 주입 뿐이라는 사실을 최는 안다.
이강헌:재관아, 좀 어때? 많이 추워? 그래도 아까보단 괜찮지? (곧장 뻗은 팔대로 몸을 기울여 끌어안은 채 가까이 붙는다.)
류재관:...아픈 건 이제 괜찮습니다. 춥기만... 아니, 많이 춥습니다. (눈을 질끈 감으며 팔을 둘러 등을 끌어안았다. 전해지는 체온에 크게 떨리던 몸이 점차 잦아들었다.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작게 중얼인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형이 이런 수고까지 하시고.
이강헌:너 아픈 게 뭐가 수고야? 그런 말 하면 안 돼. 알겠지? (이렇게 있으면 나중에 더 추울 텐데. 옷자락으로 목가 위로 맺혀있는 식은땀을 덮어 덜어낸다.) 어휴, 산 게 용해.
류재관:그래도, 제대로 상의도 없이 언약을... 형한테 중요한 일이고. 어쩌면 저보다 더 잘 맞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닿은 손길에 온순한 눈으로 손이 닿는 경로를 쫓는다. 이윽고 길게 숨을 뱉어낸다. 희미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이러니 어릴 때 생각이 납니다. ...감기로 크게 고생하면 늘 형이 와서 병간호 해주셨는데요.
이강헌:나는 원해서 한 거고~ 네가 다른 사람이랑 하고 싶으면 바꿀 수도 있다니까, 바꾸고 싶으면 나중에 알아보러 가자. (거슬리지 않게 조심히 닦아내던 손길이 머리칼 위로 향한다. 젖은 머릿결을 가르고 정리하다 다시 쓰다듬어 부산스럽게 어지럽혔다.) 그때는 작기라도 했는데, 다 커서 그렇게 좋아하면 어떡해? 아픈 마당에 이렇게 막 웃고. 형아 속은 다 태워놓고서~!
류재관:아니, 저는... 전. (이 사람이 만들어내는 너울에 홀려서 부족에서 부족을 오가던 어린 날의 자신을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머리칼에도 정리할 기운마저 죄 빠졌는지 그저 멍한 눈으로 상대의 환한 얼굴을 응시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가던 감각이 여전히 생생했다.) ...안 웃었습니다. 잘못 보신 겁니다.
이강헌:근데, 나는 너랑 계속 하고 싶어. 주변에서도 너 놓치지 마라더라? 넌 누구나 다 잘 맞아서 튀어간대. 여기저기.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리니 입꼬리가 높게 걸려 내려오질 않는다. 난잡해진 머리칼 아래 눈두덩 부근을 엄지로 부드럽게 매만져 흐릿한 눈을 선명히 응시한다.) 진짜? 나 눈 좋은데?
류재관:...저는 이제 형의 불꽃이 아니면 안 됩니다. 눈이 너무 높아져서요. (눈꼬리가 미약하게 둥글게 휘어진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저도 형과 계속 하고 싶습니다.
이강헌:...내가 어린애 기준을 너무 높여놨나? 그럴 정도긴 하지. 너도 나름 불꽃 못지않게 잘 튀는 애니까, 내가 잡아줄게. 그럼 서로 가지는 거로 쌤쌤이다? 막 이래~
모하메드 5세 광장에서 모하메드 알 한살리 거리를 따라 바다 쪽으로 10여분 걸으면
대형 선박들이 정박한 카사블랑카 항구가 나타난다.
유럽 국가들과의 거의 유일한 교역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오전부터 카사블랑카 항구에서 짐을 잔뜩 실은 트럭 여러 대가 각성자사관학교로 들어왔다.
새 나라가 만들어졌다고 한들 멀쩡한 건물을 부수고 새 벽돌을 올릴 까닭은 없었으므로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도시들은 저마다 기존 건축 양식을 아직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모로코의 상징은 흰 벽에 녹색 지붕을 이은 호화롭고 장대한 건물들.
아라베스크 문양이 조각된 나무판이 벽면을 둘러싸고,
세밀한 조각과 촘촘한 문양은 사람을 황홀케 했다.
종교 건축물처럼 웅장한 파사드를 지나 여러 개의 건물을 거쳐 이르는 중앙 정원은 안달루시아풍이다.
오늘은 각성자사관학교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는 ‘베로니카 주간’ 둘째날이다.
다른 아프리카 지역에서 유래한 것도 아닌 절일이지만 학생들은 베로니카 주간을 좋아했다.
초대 학장이 어릴 적 동생의 생일이 되면 가정에서 하던 놀이를 시험 삼아 내놓았던 게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어 이제는 아예 축제 주간으로 확장된 것이다.
동아리들이 준비한 행사에 참여하거나 미로 찾기 놀이에 끼는 등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기숙사 밑에는 류재관이 기다리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푸른색의 눈이 기분좋게 휘어졌다.
류재관:벌써 광장 쪽은 소란스럽더군요. 축제는 축제인가 봅니다.
이강헌:이런 분위기가 아니면 축제가 아니지! 그래도 맛은 잘 나네~
이 계절이면 흐벅지게 피어 푸르게 빛나는 아라헤윰꽃이 너른 정원과 온실에 가득했다.
아라헤윰꽃은 햇빛에 닿으면 바다처럼 푸른 빛을 강렬히 뿜어내다가도,
막상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보면 뒷면이 비칠 만큼 투명한 꽃잎이 고아하게 흔들린다.
해파리 같은 암술이 황금을 품은 양 귀한 자태를 뽐내니,
시인이 다음 천 년간 내내 노래해도 부족할 것처럼 아름답다.
야자수 아래의 흰 벽돌과 로코코식 낮은 울타리 안에 피어나 깨질 듯이 반짝이는 꽃들.
군데군데 켜 놓은 조명이 부드럽게 퍼지면서 만드는 야경,
축제 둘째 날, 이 밤에는 베로니카 주간의 핵심적인 행사인 ‘아라헤윰꽃 찾기’가 열린다.
종종 피어나는 돌연변이를 아예 품종으로 만든 은색 아라헤윰꽃이 있는데,
이 은색 꽃을 푸른 꽃들 사이에 단 서른 송이만 숨겨 놓는다.
학급마다 정원을 돌며 은색 꽃을 가장 많이 찾아낸 사람이 상품을 받는 놀이였다.
두 사람이 짝을 짓는데, 이번에도 류재관과 최는 한 팀이 되었다.
설계 반동이라는 상황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1학년인 주제에 벌써부터 정식 페어가 되었다는 것이 소문 났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가 발코니에서 함께 야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다.
이강헌:음... 찾아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넌 어때?
류재관:저도 찾아보고 싶습니다. 은색의 아라헤윰꽃은 실제로 본 적 없으니까요.
이강헌:원래 본 적 없는 게 더 보고 싶은 법이지. 찾으러 가자!
이강헌:
관찰력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류재관:
관찰력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3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두 사람이 정원을 오가며 꼼꼼하게 탐색한 결과,
최는 두 송이, 그리고 류재관은 한 송이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찾은 아라헤윰꽃을 손에 쥔 채 두 사람이 분수대 앞 벤치에 앉는다.
이대로 쉬어도 좋고, 잠시 숨만 돌린 뒤 더 찾아보아도 좋다.
류재관:낮에 보았을 때는 푸른 빛이었는데, 밤에 보니 확실히 다릅니다. 이름이 바다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던데... 왜 그렇게 지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강헌:그러게. 푸른빛이라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까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류재관:...그나저나 여유롭고 활기찬 분위기는 참 오랜만입니다. 현무제 때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강헌:그렇게 말하니까 또 처음 만난 날 생각나는데? 넌... 어휴. 지금은 너무 크다.
류재관:허, 십 년 전과 비교를 하신다고요? 안 큰 게 더 이상합니다.
이강헌:얼굴은 나름 그대로인데... 몸만 큰 게 웃기잖아. 안 그러냐?
전 슬슬 들어갈까 합니다. 아직 오늘 치 복습도 다 못 끝냈고... 형 더 계실 거면 계십쇼.
이강헌:헐, 나만 두고? 그렇다고 또 들어가기에는 아쉬운데...
류재관:아까 저쪽에서 무알콜 맥주 팔던데, 그거라도 마시지 그러십니까.
이강헌:오, 딱 좋네! 그래야겠다. 조심히 들어가~ 공부 열심히 하고!
류재관:그럼... 제 꽃도 형이 가지고 계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닭은 시장 가는 것을 거절할 수 없고, 죽은 독수리의 날개깃은 흩어지기 마련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던 학생들이 오전나절 내내 침대 위나 뒹굴며 쉬고 있었기에 학내는 고요했다.
평화를 깬 것은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몇몇 학생이 그 방향으로 뛰쳐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창문을 통해 내다봐도 좋고, 직접 가 봐도 좋다.
이강헌:(축제에 비명? 창문 밖으로 고개 내밀어 근원지 살핀다.)
쓰러져 발작하며 피를 토하는 학생을 둘러싸고 주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 틈을 뚫고 군홧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2주 전 들이닥쳐 아직도 ‘불온 게시글’ 사건을 수사 중인 헌병대원들이었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헌병대 예장에는 기묘한 모자-가면-투구가 포함되어 있다.
서아프리카 도곤족의 전통을 따른 사팀베 마스크가 그것이다.
디자인 자체는 서아프리카 전통에서 따온 것이니 이상하다고 할 게 없지만,
가면을 쓴 헌병대가 붉은 줄과 구슬을 관자놀이에 드리우고
표정을 감춘 채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아무래도 조금 두렵기 마련이다.
노노이 라가힛은 바닥을 긁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검붉은 에너지가 마치 자아를 가진 듯이 움직이며 그를 감싸 죄었다.
라가힛의 꼴을 보고 놀란 요한이 달려와 몸을 구부렸다.
눈에 품은 렌즈로 아주 오랜 노출을 주어 사진을 찍듯이 그 광경을 들여다본다.
누가 1학년 류재관 좀 불러! 라가힛은 류재관과의 동조율이 가장 높지 않았나?!
군중이 둥그렇게 모여 선 한중간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사람이 터지면 그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강제로 알게 되었다.
안에서부터 폭탄 스위치가 눌린 것처럼 노노이 라가힛은 말 그대로 터졌다.
공중에 살점과 피가 흩날리는 광경을 굳이 무참하게 묘사할 필요는 없겠다.
곁에 서 있던 요한과 류재관은 피를 흠뻑 뒤집어썼다.
이강헌:
SAN Roll
| 기준치: |
67/33/13 |
| 굴림: |
2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너무도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순간이라 비명은 뒤늦게 산발적으로 커졌다.
비틀거리며 도망치거나 주저앉아 구토하는 학생도 있었다.
류재관 또한 피에 흠뻑 젖은 채 텅 빈 눈으로 바닥을 응시할 뿐이다.
그 가운데에서 헌병대 한 사람이
노노이 라가힛의 가장 큰 부분을 집어들었다.
도곤족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가면을 자아 표현과 제식 수단으로 썼지만,
장례식에서 쓰는 가면은 오로지 사팀베 마스크 하나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인류의 기원 이후 아주 오랜만에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할을 가질 수 있었던 아프리카인들이
‘비문명적’ 방식으로 위압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아니었나 논설한 적이 있다.
억압받지 않던 자가 억압받던 자들의 방식을 야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야만이 될까?
어떤 역사의 신성한 전통을 압제에 사용하는 것은 야만이 아닐까?
이 아프리카 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부터 그러하였듯 기록보다는 구전이어서,
말할 입이 없어진 목소리는 이내 사그라들었다.
오래 내려앉은 그 침묵을 사르고 타는 불꽃처럼.
요한이 고함을 지르며 라가힛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러자 라가힛을 집어들던 헌병대원이 빈 손으로 가면을 밀어 벗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인상이 참 좋은 청년이라고 평가했을 법한 남자의 얼굴이다.
이강헌:
관찰력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7 |
| 판정결과: |
실패 |
관찰력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19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최는 그 청년과 요한 에를리히가 퍽 닮았다는 느낌을 받고,
사관생도가 헌병대원에게 함부로 반말을 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남자: 노노이 라가힛의 신병은 헌병대에서 인수하겠다. 손을 놓기를 권유한다, 요한 에를리히.
요한 에를리히:이 애를 더는 훼손하지 마! 살아있을 때 가지고 논 걸로 충분하잖아, 미친 자식들아!
조심스럽게 ‘라가힛의 가장 큰 부분’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고선 한쪽 무릎을 굽혀 (자신과 닮은) 얼굴을 바라본다.
남자: 사관생도 노노이 라가힛에게는 즉결 처분 가능한 혐의의 증거가 있다.
남자: 그가 불법적인 약물을 도핑해 그 부작용으로 발작을 일으켰다는 증언이 접수되어 수사한 결과 여러 혐의를 확보했다.
이 폭사(爆死) 역시 관련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부검이 필요하겠군. 수사가 종료된 후에는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하여 유해를 화장하겠다. 불만 있나, 요한 에를리히? 그렇다면 정식으로 소를 제기하는 건 어떤가.
요한 에를리히:개새끼야! 닭이 시장 가는 것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이야!
이제 공화국 시민들은 다양한 옛 지역에서 유래된 속담을 다 섞어 쓴다.
‘닭은 시장 가는 것을 거절할 수 없다’는 말은 중부 아프리카에서 올라온 관용어구였다.
이성적으로 구는 요한답지 않게 점점 격앙되고 있다.
헌병대에게 이런 식으로 반항하다간 징계 감이다.
그들은 내버려두고 피를 뒤집어쓴 류재관을 데려갈 수도 있겠다.
대인 기능 판정 혹은 은밀행동, 민첩 판정 등 상황에 어울리는 다양한 판정을 할 수 있도록 권한다.
이강헌:저기~! 잠깐, 잠깐만요. 상황이 상황인 건 알겠는데, 좀 진정부터 하면 안 되나? 더 번져요, 이거.
이강헌:
말재주
| 기준치: |
65/32/13 |
| 굴림: |
39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최의 말에 요한은 씨근덕대면서도 서서히 시신에서 손을 뗀다.
요한 에를리히:...이강헌, 너는 류재관이나 데려가. 마무리는 내가 한다.
이강헌:어지간히 심각해야 애를 데리고... 아이고, 알겠습니다~
재관아, 괜찮아?
...라가힛, 라가힛이.......
노노이 라가힛의 시신은 결국 헌병대가 회수해 갔다.
학생들에게는 기숙사로 돌아가 경거망동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 식의 공지가 내려왔다.
그나마 기숙사 안에서는 자유로이 다닐 수 있었으므로
친구들의 방과 방을 건너다니며 몰래 저들만의 추측을 속삭이고 있는 듯싶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소문은 학생회로 처음 전해져서,
기숙사 휴게실을 몇 개 거쳐 교정 전체로 퍼졌다.
아프리카 연합 공화국의 지독하리만치 세련된 통치 방식은 사람들을 자기 주도적으로 감화시켰다.
한번 스러진 인류를 복구해 빛나는 새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어.
나라가 잘 하고 있으니 박수를 치는 것은 시민의 지지이지 신민의 굴종이 아니야.
사람들은 공화국 정부가 정상적인 정책을 펼치지 않는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전시도 아닌 교내에서 헌병대원의 손에 학생회장이 죽었다고 한다.
이 문명적인 나라에서 실로 있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한 잔인한 억압을 보면 일단 공포에 질려 입을 닫는 법이다.
최는 기숙사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정보 없이 가만히 숨어 있어서는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
학생들이 많이 가는 장소를 떠올려 보니
기숙사 1층 학생식당이나
2층 휴게실 정도가 생각난다.
이강헌:돌아다녀도 괜찮겠어? 좀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류재관:저 이제 괜찮습니다. ...며칠 내리 기운 없이 굴어서 죄송했습니다.
이강헌:아니, 그럴 수 있지. 눈 앞에서 그런 걸 보면...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류재관:괜찮다니까요. 이젠 악몽도 안 꿉니다.
......게다가, 유리 선배의 일을 제대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요. 무섭다고... 눈만 가리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이강헌:악몽만 안 꾼다고 다 괜찮아지는 건 아니잖아. 정보야 내가 알아와서 알려주면 되는 거고.
그래도 괜찮다 하면 다행이긴 한데... 걱정되는 걸 어떡해?
류재관:...완전히 멀쩡해졌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형, 두렵다고 진실을 외면하고 싶진 않습니다.
언제까지고 형의 손만 빌릴 순 없습니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제가 형, ...당신의 페어라는 사실은 아셔야지요. 저만 두고 가실 겁니까?
이강헌:...그래, 그럼. 네가 괜찮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냐.
일단 넌 아직 휴식이 필요하긴 하니까, 빨리 끝나면 쉬는 거다? 기숙사 아래층 먼저 가 보자.
학생식당에는 헌병대원 두 사람이 경계를 서고 있다.
들어 보니 공식적인 사유는 어제 라가힛의 사건 탓에
교내에서 동요가 일어나는 것을 단속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주방 직원들도 친근하던 평소와 달리 좀처럼 말을 걸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직원: 학생, 요한 군이랑 그 멘토인가 그거지? 요한 군이 어제부터 통 안 보이는데, 큰일이네……. 괜찮으면 이것 좀 전해줄 수 있겠어요?
라면서 직원이 건넨 것은 웬 달걀 두 개와 음료수였다.
이강헌:식당도 안 오셨어요? 이상하네... 찾아보고 마주치면 전달할게요.
받아든 달걀이 묘하게 가볍고 안에서 달각달각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 그 광경을 유심히 보고 있는 학생 하나가 눈에 띈다.
1학년 명찰을 달고는 있는데 영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는 멀찍이 선 헌병대원들의 눈치를 보더니 식판을 돌려놓는 척 다가와 속삭였다.
: 앙셰네 지 수습기자예요. 우리 빨대가… 아니, 미안해요. 그러니까 우리 취재원이, 학교에서 어제 큰일이 있었다고 하길래 내용을 알고 싶어서 몰래 들어왔어요. 뭐 얘기해줄 거 없나요?
이강헌:아, 그게... 학생 중 한 명이 원인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몸이 완전히 터졌거든요. 무슨 불법 약물을 했다나 뭐라나... 듣기로는 그랬는데, 정확하게 밝혀진 건 아직 아무것도 없어요.
앙셰네 지라면 풍자와 비판으로 유명한 대형언론사다.
: 혹시 나중에라도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으면 이 번호로 연락 줘요. 부탁이에요.
그 사이, 류재관은 주변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류재관:...혹시 요한 선배가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시는 분 있습니까?
류재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최와 시선을 교환한다.
이상하게 식당을 제외하면 기숙사엔 헌병대원이 전혀 없었다.
헌병대 수색이 학교와 전부 다 협의되지 않기라도 한 걸까?
퍽 넓어서 작은 도서관처럼 여러 학생들이 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수십 개의 눈동자가 화들짝 놀라거나 경계하는 시선으로 돌아보다가,
: 얘기 듣고 온 거야, 아니면 그냥 들른 거야?
이강헌:...무슨 얘기? 그 사이에 또 생겼어?
우리, 그 소문이 맞는지 확인 좀 해보려고 모였어. 진짜라면 학교를 다 뒤집어야 할 사안이잖아. 유리 선배 얘기 말이야.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엎드려 자고 있는 학생들,
어디론가 연락을 잔뜩 돌리는 학생들이 있었다.
요즘엔 잘 쓰이지 않는 물리 키보드까지 두드리는 중이었다.
요한도 잠을 제대로 자지 않았는지 얼굴 상태가 영 아니었다.
이강헌:아, 선배님. 이거 식당 직원분이 전해달라 하시던데요? (중앙으로 다가가 음료수와 달걀들 내민다.)
요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그것을 받는다.
부활절도 아닌데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그 달걀에는 ‘성심성당’ 이라는 손글씨가 쓰여 있었다.
안에서 나타난 건 삶은 달걀 흰자가 아니라 빈 내부였다.
요한 에를리히:너희 마침 잘 왔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이강헌:요즘 넘치는 게 시간이죠. 어떤 일인데요?
요한 에를리히:오전 04시를 기해 정부지침으로 학교와 외부 통신이 완전히 차단됐다. 인자미나도 접속이 안 돼.
학교가 정보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이지. 내 설계로 이 차단 시스템을 잠시 들어내는 중이야. 유리 얘기가 사실이 맞는지부터 확인하고, 맞다면 다음 대응 방침을 생각할 거다.
류재관:저, ...혹시 제가 아는 그 성심성당이 맞습니까?
요한 에를리히:우리 학교 바로 옆에 성심성당, 거기 맞아.
내가 부탁해서 신부님께서 보내 주신 거다.
애초에 유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연락주신 것도 신부님이고. 만일을 위해 물리적인 공간에 데이터를 저장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서버에 뭘 기록해 봤자 검열당하면 끝이니.
에너지를 섬세하게 다루어 서버 간 데이터 전자 신호에 간섭하는 용도로 활용하곤 한다.
요한 에를리히:학교 서버는 규모가 몹시 크고 복잡해. 보안도 아주 철저하지.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는데, 내 설계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곧바로 추적될 거다.
너희는 이 학교의 유일한 정식 페어잖아. 동조율이 안정된 페어가 에너지를 뒷받침해 주면 안정적인 설계에 도움이 돼.
…하지만 이강헌, 류재관. 이 일을 돕는다는 건 너희도 이 학교나 정부 지침에 반기를 드는 동조자가 된다는 뜻이다.
나는 유리와 관련된 진실을 파헤쳐야 할 필요가 있고, 여기 모인 애들도 그 목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지만, 너희 생각이 어떨지는 몰라. 괜찮겠어?
이강헌:에이, 멘토 말을 어기는 멘티가 어디 있어요? 지금 사람들도 죽는 마당에... 그렇지?
제가, ...아니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구현자는 본인의 이능력과 관련된 핵심 기능 판정을,
설계자는 항법 판정을 시도해 두 사람이 모두 성공할 때까지 반복한다.
류재관:
항법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1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이강헌:
도깨비불 Roll
| 기준치: |
95/47/19 |
| 굴림: |
6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 ……돼! 잠깐만, 성당으로 전화 걸어 볼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학생들은 단계별로 차단이 해제되었는지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요한 에를리히:좋아, 이 휴게실 범위 내에서, 그러니까 내 태블릿 핫스팟으로 데이터가 연결된 범주 내에선 추적당하지 않고 기록 없이 자유롭게 웹에 접속할 수 있다.
우선 유리가 정말 헌병대에게 끌려간 게 맞는지 확인해보려고 해. 신부님이 목격하셨다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요한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홀로그램 패널을 위로 끌어올려 크게 키웠다.
화면이 여러 개로 분할되며 다양한 각도의 CCTV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새벽 시간대를 계속해서 돌려 보며 유리를 찾아내고 있는데,
자료 조사 판정을 통해 이 과정을 도울 수 있다.
이강헌:
자료조사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67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화면 구석 ‘16번 카메라’에서 헌병대원 네 사람이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을 어깨에 둘러메고 기숙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을 발견한다.
이강헌:신부님이 목격하셨다 한 시간 언제인지 아세요?
이강헌:아이고, 맞는 것 같은데... 방금 구석 화면에 사람 끌고가는 게 보였어요. 시간대도 비슷해요.
: 어, 차에 태운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봐!
: 미카엘관 뒤쪽으로 나갔네. 저기로 가면 방위사령부 방향 아냐? 헌병대 본부가 거기잖아!
: 하지만… 저건 ‘끌려갔다’지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근거는 아니잖아.
요한 에를리히:만일 방위사령부로 끌려 갔고,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치료를 위해서든 은폐를 위해서든 병원으로 연락이 갔을 거야.
군 내부에서도 난리가 났을 테고. 저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병원이 어디지?
: 근데 거기 물어본다고 이렇다할 대답이 나오겠어?
: 괜히 우리가 들쑤셨다가 더 큰일나는 거 아냐?
: 정보 캐는 건 기자들이나 능숙한 일이잖아. 차라리 어디 제보를 하는 건 어때?
이강헌:외부 통신도 차단됐던 마당에 남들한테 알리면 그게 더 일이 커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학교가 손 쓰고 있으니 어디까지 어느 족속인지 알 방도도 없고. 저희가 직접 하는 게 그나마 안전하고 낫지 않을까요?
류재관:...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아무리 신중을 기한다고 한들, 저희 신분으로 움직이기에는 제약이 크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추적 당할 겁니다.
형, 아까 이야기 나누었던 양셰네 지의 수습기자 기억하십니까? 그 자의 도움을 받는 건 어떨까요. 양셰네 쪽이라면 저희 어머니도 믿을 만한 곳이라 말씀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강헌:밖에서는 이번 일을 하나도 모르잖아. 그 사람한테 아까 조금 흘리긴 했는데, 그거로 될지도 모르겠고... 접촉한 김에 그냥 제대로 하자는 거야? 이 상황에 외부인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류재관:이러나 저러나 그 사람이 이 학교 내부까지 잠입했다는 건 분명 그를 돕는 이가 있단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헌병대일 확률은 낮을 겁니다. ...게다가, 차라리 언론이 이 사실을 퍼뜨린다면, 헌병대가 이를 수습하려 애쓰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강헌:지금도 헌병대원 몇 명에 다들 눈치 보고 쩔쩔매는데, 수습하는 동안 교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오히려 더 강압적이게 끌고 가면 어떡해? 혼자 다치는 것보다 부상자들 늘어나면 그게 더 보기 힘들어.
요한 에를리히:너희 앙셰네 지 얘기하는 중이냐? ...난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쪽은 그나마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로 기사를 많이 내는 곳이니 한번 제보해 볼만 해. 그쪽에서 취재해 주길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가능한 많은 학생들을 모아 항의를 하는 거다.
유리가…… 유리가 지금 어떤 상황이든 간에, ‘대학 내에서 학생을 헌병대가 새벽에 몰래 끌고 갔다’는 사실 자체가 특종 감이니.
류재관:...형, 아직도 내키지 않으시면 연락은 제가 하겠습니다.
형이 위험해지는 건 싫습니다.
류재관이 명함 속 번호로 전화를 걸면 학생식당에서 마주쳤던 수습기자가 연락을 받는다.
상황을 간략히 전달하고 취재를 요청하자, 기자가 대꾸한다.
: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우린 우리대로 알아보고, 정황이 나오면 공유해 줄게요.
급한 일이 있으면 이 번호든, 앙셰네 지 공식 번호든 연락해요. 위에 보고해 둘 테니까요.
류재관:...예,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학생들이 저마다 할 일을 하며 상황 정리를 기다리는 동안,
류재관:선배,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됩니까?
그때 선배와 이야기 나누던 헌병대원, 혹시... 가족입니까?
요한 에를리히:...그래, 라가힛의 신병을 인수하겠다던 헌병대원은, 봐서 알겠지만 내 형이야.
난 집안과 절연했지만 그 자식이 해선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단 사실을 안다.
첫 가상 훈련 때 기억나? 그때 유리는 하산 2세 모스크를 보고 있었지.
우리는 북동 게이트 바깥을 묘사한 가상세계에 있었잖아. 하늘길 시스템의 크로노미터 지도를 그대로 따른.
그 모스크는 그 방향에서 보일 수 없어. 좀 더 서쪽에 있으니까.
유리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지도마저 조작되고 있다고.
요한 에를리히:정부가 뭔가 말도 안 되는 걸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
스와콥문트는 카사블랑카로부터 정확히 1만 km 떨어져 있다. 진실을 호도하기엔 너무 좋은 거리감이지.
그러니까, 카사블랑카의 지도가 스와콥문트 문제를 증거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처음의 의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거지. 보여서는 안될 게 보이니까.
그때부터 유리와 내가 손을 잡고 스와콥문트 문제를 파 보기 시작했어. 아놀드 박사와 관련된 소문이 그때부터 돌고 있었거든.
요한 에를리히:…맞아, 인자미나에 글을 쓴 게 유리야.
내가 그걸 도왔고.
...하지만! 설령 그 모든 소문이 거짓이라서 처벌을 받아야 하더라도, 그 결과가 새벽에 남몰래 끌려가 종적을 감추는 형태여야 하나?
마지막으로 하나만. ...보츠와나 망명 정부 쪽에 대해 아시는 바 있습니까?
요한 에를리히:……그건 지금 당장은 말해 주기 어려워. 류재관, 네 어머니께서 스와콥문트에 계시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
삶과 죽음은 한 선으로 가로놓여 있어, 동일한 권리 나누어 받은 시민들이여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류재관이 앙셰네 지에 한 제보는 상당한 유효타였다.
똘똘 뭉친 기자들이 병원과 군 양쪽에 '빨대를 꽂고' 소식을 물어 왔다.
오전 07시 04분, 유리 모하에의 시신이 하씬느 병원 응급실로 실려 들어왔다.
심폐소생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시신이 구급차에 실릴 때부터 이미 심정지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헌병대는 참으로 교묘한 방식을 사용해 유리의 혐의와 라가힛의 죽음을 하나로 묶었다.
수사 과정 중 라가힛과 동일하게 약물을 과용한 유리가 쇼크사했다는 것이 군과 정부의 입장이었다.
고작해야 가끔 강성 노조의 시위 정도나 일어나던 도시에서 갑작스레 불길이 치솟았다.
위 현장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기술은 재앙의 날을 거치며 실전되었지만,
화염병만 저항의 상징이겠는가? 무기는 많았다.
누구도 공격하지 않은 채 학생회관을 점거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이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자들이 한번 폭력사태를 일으키기 시작하면
상황을 겉잡을 수 없다는 학생회의 판단이 들어맞았다.
4학년 학생들이 학생회관을 겹겹이 둘러 지키고,
아직 전투 역량이 모자란 저학년들은 내부에 모여 앉아 손을 잡고 촛불을 들었다.
최 또한 학생들과 함께 학생회관의 농성에 동참하고 있다.
시선은 건물과 옥상을 타고 흘러 모래바람에 실린다.
생생하게 살아 지펴진 격노가 그 부르짖음 안에 있다.
요한 에를리히:높으신 분의 말 한 마디는 한 세기가 끝날 때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눈썹 하나 까딱하면 날벼락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알아서 몸을 낮추고는 풍자시를 달콤한 아부의 시로 고쳐 버린다.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우리…….
차마 목이 메어서, 요한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역사의 기로에서 적극적이거나 방조적이거나 소극적일 수 있다.
최는 수첩을 들어 요한의 연설을 받아 읽어줄 수도 있고,
이강헌:(시선이 떨어지는 수첩에 맞춰 낙하한다. 발치에 머무르는 수첩을 주워 적힌 글씨를 읽는다.)
「그러나 우리 노래의 선율이 서글픈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이강헌:그러나 우리 노래의 선율이 서글픈 것은 어찌할 수가 없다...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니라.
그 문장이 최의 명료한 발음을 타고 터진 순간,
근처 반경에 있던 모든 스마트워치가 새빨갛게 진동하며 경고음을 내보냈다.
이를 악문 요한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어 나갔다.
세상에서 삭제된, 기록말살형을 받은, 끝없이 무수한 텍스트를 아십니까?
러시아 땅이 절반쯤 황폐화되었다고 해서 네크라소프의 시까지 사라져야 합니까?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던 우리는 어제 학우 두 사람을 잃었습니다.
울며 더듬더듬 준비한 말을 읽는 학생도 있었고,
분노하여 주먹을 휘두르는 학생도 있었으나 대체로는 평화로웠다.
지나치게 큰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이강헌:
SAN Roll
| 기준치: |
66/33/13 |
| 굴림: |
65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지금 즉시 학생회관 점거를 중단하고 해산하도록 한다.
00시 정각까지 해산하지 않을 시 헌병대는 강경 진압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반복한다, 각성자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알린다…….
새하얘진 얼굴, 벌건 눈동자들이 요한과 학생회 임원들에게 향했다.
진압이란 단어까지 썼다면 학교 징계 따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체포당했다가,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빠져나갈 사람은 지금 나가도록 해.
: 선배는요? 지금 제일 위험한 거 사실 선배예요.
: 1학년, 2학년부터 일단 내보내. 농성을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지 전교생의 절반이 여기 몰려 있을 필요는 없잖아.
요한은 류재관과 최의 손을 붙잡고 눈을 불태웠다.
옳은 말은 거세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살아서 이야기하는 거다.
그래야 다음 세대로 우리 말들이 전해질 수 있다.
어떤 구전은 기록보다도 강력하다. 내 말 이해하겠어?
이강헌:나이가 어리고 학년이 낮아서 시작한 일을 두고 가는 건... 그만두겠다는 소리도 아니지만, 그래도 제 성미에 맞지가 않아서요. 날벼락이야 맷집으로 맞으면 되잖아요.
요한 에를리히:너를 보면... 꼭 1학년 시절의 내가 떠올라. 내가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성미 죽이며 살아왔던 이유가 뭔지 아나? 너같이 싹수 노란 애들 보면 꼭 키워내고 싶어서야.
그리고, 너희들이 내 뜻에 동조한다면 당장 여기서 벗어나. 도망치는 게 아니라 퍼뜨리는 거다.
우리는 등불이야. 이곳에서 한꺼번에 전소 되어서는 안 된다. 꺼지지 않고 멀리 퍼져야 살아. 알아?
재관아...
죽지만... 죽지만 마세요.
요한 에를리히:나도 쉽게 죽을 생각 없어. 유리 그놈 몫까지 아주 명 길게 살 거다.
치솟는 말들을 삼키던 그는 류재관에게 급히 제 수첩을 쥐여 주었다.
요한 에를리히: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지금 주는 거다. 이건 네가 가져가.
가면서 빨리 읽어 봐. 난 내용 다 외우고 있어.
류재관은 조금 당황하지만, 이런 걸 가지고 실랑이할 시간이 없다.
두 사람은 아우성치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제야 멈춰선 류재관은 급히 수첩을 훑어보고,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린다.
류재관:요한 선배가, 하필 저를 지명해서 이걸 준 이유가 있습니다.
인자미나에 올라왔던 글 기억나십니까? 스와콥문트 관련 이야기를 무슨 망명 정부가 수집하고 있다던 말이요.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 땅에 나라라고는 공화국밖에 없는데 어디에 망명 정부가 있다는 말인지.
...여기, 그 연락책과 위치가 쓰여 있습니다.
칼라하리 사막을 넘어서, 보츠와나에.
사이렌 소리, 확성기 소리가 뒤엉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미 결정을 내린 류재관은 이를 악물고 말한다.
형은 오늘 사건과 아무 연관도 없고, 저 또한 본 적 없는 겁니다.
이강헌: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어쩌고?
류재관:전, …이곳에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보츠와나 망명 정부라는 곳에 가야, 제 어머니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건 형도 이해하시겠지요.
떠난다면 더는 미룰 수 없으니 가능한 빠를수록 좋습니다.
학내에 소란이 벌어진 오늘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휩쓸려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니.
사상자 한 사람쯤 더 생긴다고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이강헌:이해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그러니까. 가겠다고? 죽은 척하고? 지금 당장?
류재관:…형은, 언약을 강제로 끊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기억을 잃습니다. 뭘 잃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이름이 될 수도 있고, 가장 소중한 순간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학교를 떠난 게 들키면, 각성자가 사관학교를 떠났다는 것 자체가 중죄이니 페어인 당신도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을 게 뻔합니다.
그러니, 오늘 사고에 휘말려 제가 죽었다고 증언해 주십시오.
상대가 죽어서 해제된 언약만이 기억 손상도 일으키지 않고, 에너지 색상을 원래대로 돌이키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바로 지금이, ......제가 없어지기에 완벽한 적기입니다.
류재관:꼭 지금이어야 합니다. 다음은 없습니다.
이강헌:그런, 그런 적기가 어디 있어? 지금 그런 걸 나보고 시늉이라도 내라고?
지금 나한테 믿을 사람은 형밖에 없단 거, 아시잖습니까.
스마트워치는 각성자들을 에너지 파동으로 구분합니다. 우리는 언약했으니까... 이걸 풀어서 형에게 주고, 형이 이 시계를 학생회관에 던져 놓으면 위치 추적이 안 될 겁니다.
그게, 제가 떠났다는 걸 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걸 맡기고 갈 사람이... 형 말고는 없습니다.
이강헌:이런 걸 할 거면 내가 모르게 해야지. 아니, 어차피 언약 맺은 이상 어떻게든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니야?
나더러 두고 갈 거냐고 할 때는 언제고?
류재관:두고, 떠나는 게 아닙니다. ...다녀오는 겁니다.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저라고 형과 떨어지고 싶겠습니까?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불꽃의 그림자라도 되고 싶어서! ...그래서 도깨비 대장간 문 두드리던 게 십 년 전입니다. 나한테는 그때부터 형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이 가장 끔찍한 건 저입니다.
...지금 주려던 게 아니었는데.
따뜻한 듯 시원한 기운이 서린 무언가가 최의 손에 쥐여진다.
류재관:...제가 만든 겁니다. 작두에 달고 계십시오. 원기 보충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가 똑같이 생긴 방울을 꺼내 보이자, 최의 귓가에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딸랑, 딸랑. 듣는 것 만으로도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
류재관:저도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둘은 붙어있을 때 공명하며 소리를 냅니다.
방울이 주인으로 인정한 형만,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부탁입니다.
이강헌:부탁이라고만 하면 다 정중한 줄 알지...
마음대로 해.
류재관:...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 웃는 얼굴을 보는 건 힘들겠지요.
다녀오겠습니다. 몸 건강히 계십시오.
이강헌:너만 잘하면 되니까, 내 걱정하지 마.
이강헌:그건, ...그냥 네 욕심껏 아무거나 다 알아서 해. 어차피 뭐라고 할 수도 없는데.
정말로, ...돌아오겠습니다. 당신 곁으로.
믿고 의지하던 대상을 놓고 떠나는 것이 생살을 자르는 것보다도 힘들다.
꺼내 보고 쓸어 만질 때마다 닳아 없어지니까.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 텅 빈 구멍이 남으니까.
멈추지도 망설이지도 말아야 할 순간이 닥쳤다는 것을 안다.
죽기보다도 힘든 순간을 고르는 것이 선택이기는 한가?
슬픔도 분노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잘라 놓고 떠나는 것 같은 감각 속에서
진실을 알고자 한 발짝 나아가는 게 대체 의미가 있기는 할까?
심장을 쥐뜯는 것 같은 성장통 안에서 그는 달렸다.
끝내는 소나기로 길어져 키질되는 쌀처럼 땅바닥에 까불렸다.
어떤 빗줄기는 해풍의 구조를 이루는 방파제처럼 윤무의 일부에 이르러 춤을 추었다.
그러나 신의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라면 이런 이별은 겪어도 되지 않으리라.
학생회관 쪽에서 울분에 찬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은 한 선으로 가로놓여 있어, 동일한 권리 나누어 받은 시민들이여
여기 화합과 희망의 상징, 위대한 화음이 있으니
이 땅의 더 나은 미래를 우리 자녀들에게로 넘기자…….
계절에 맞지 않게 일부러 피워낸 아라헤윰꽃이 지천을 뒤덮은 오늘은
4년 전의 소요는 학교에 짐승이 할퀴고 간 듯한 총탄 자국 몇 개만 남겼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오발에 의한 사고라고 판단되어 몇 사람이 징계를 받고 군복을 벗었을 뿐이었다.
이 위대한 공화국에 악의적인 사고란 것이 있기나 하겠는가?
도열한 학생들은 저마다 다른 태도로 바로서 연단을 응시했다.
학장의 지루한 축사가 끝나고, 귀빈들의 특별 축사가 이어질 예정이었다.
4년 전 학생회관에서의 일 이후, 학생들은 두 파로 갈려 서로를 물고 뜯었다.
'순수한 운동'이란 말이 그 시절쯤에는 농담밖에는 되지 않았다.
분기마다 한 번씩은 누군가가 밀고당하여 학교 바깥으로 사라졌고,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많은 사람이 체제에 반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변절은 사람을 이토록 지난하게 만든다.
당신을 보면 휘어지곤 했던 다정한 눈이, 영혼이 죽은 듯한 새카만 어둠이 되어 학생들을 응시한다.
딸랑, 딸랑.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사랑했던 동기들을 길러낸 자랑스러운 나라의 요람에 돌아오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2부, ‘아무도 너에게 세계를 구하라 시키지 않았다’ 에서 계속.
